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왜군, 전라도 점령 시도

전라도는 8도 중 유일하게 왜군이 점령 못 한 지역이었다. 1592년 7월 초에 고바야카와의 제6군 1만 6천명은 호남 점령을 시도한다. 왜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군은 진안의 웅치(熊峙)를 넘고, 북군은 금산의 이치(梨峙)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키로 했다.

한편 조선군은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이 웅치를 지키고,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치를 버티고 있었다.

#권율과 황진, 이치 전투 승리

7월 8일에 이치와 웅치에서 전투가 동시에 일어났다. 권율과 황진이 지휘하는 1천 5백명의 군대는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수천명의 왜군을 이치 전투에서 물리쳤다.

6월 6일에 전라·경상·충청 3도 연합군 5만명이 경기도 용인 전투에서 2천명도 안 되는 왜군에게 어이없이 패배했다. 중위장으로 참전했다가 광주로 돌아온 권율은 의병 모집 격문을 발표하고 군사를 모았다. 당시 관군은 군사도 몇 명 안 된 허울뿐이었다. 이러자 1천 5백 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후 권율은 전라도 절제사를 겸했고 이치에서 동복 현감 황진의 부대와 합세했다. 권율의 전투 대비는 철저했다. 복병은 물론이고 길 가운데와 길가 요소요소에 목책을 쌓고 함정을 파 놓았다. 산 정상에는 5색 깃발을 세워 기세를 높였고 검은 연기를 피워서 적이 우리의 병력을 알지 못하게 했다.

7월 8일 새벽에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수천명이 공격을 개시했다. 왜적은 조총을 쏘아대고 칼과 창을 번쩍이며 산 정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아군은 적을 철저히 막았다. 특히 선봉장 황진의 활 솜씨는 백발백중이었다.

왜적은 패하여 물러났다. 그런데 황진이 물러나는 왜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졌다. 이러자 왜적이 다시 정상으로 기어올랐다. 총사령관 권율은 군사들을 직접 독려해 싸웠다. 전투는 치열했다. 밀고 밀리는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왜적은 조선군의 사기를 꺾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왜적은 금산 쪽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시체는 이치 골짜기에 가득했다. 조선군의 승리였다.

일본은 이치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 중 첫째로 쳤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

한편 17세의 의병 정충신은 승전보를 의주 행재소에 알렸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은 선조에게 낭보를 전했고 권율은 나주목사로, 황진은 익산군수로 승진했다. 이항복 밑에서 일한 정충신은 무과에 급제해 1624년에는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광주 금남로는 정충신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 웅치 전투의 순절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의 관군과 의병장 황박이 이끄는 혼성군 1천명이 웅치에서 안코쿠지 에케이의 왜군 수천명과 싸웠다. 그런데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가 패해 도주하고, 정담은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7월 9일에 안코쿠지는 전주 안덕원까지 진출했으나 퇴각한 이복남이 포진하고 있었고, 전주성에는 전 전적(前 典籍) 이정란이 낮에는 깃발을 잔뜩 세우고 밤에는 봉화를 올려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 더구나 합류키로 한 고바야카와 부대가 나타나지 않아 왜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왜군은 물러나면서 웅치에서 죽은 조선군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고, 큰 무덤을 몇 개 만들었다. 그리고 ‘조선국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들에게 조의를 표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쓴 팻말을 세웠다. 적군이지만 치열하게 싸운 정신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류성룡 ‘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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