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도법스님 인터뷰

 

▲ 지난해 8월 화쟁위원회 현판식에서 총무원장 자승스님(오른쪽)과 화쟁위 위원장 도법스님(왼쪽)이 현판을 보면서 박수를 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부처님은 ‘세상의 이익·안락·행복, 즉 중생의 이익·안락·행복을 위해 살아야 된다. 이것이 수행자가 가야 될 길이고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왜 수행자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실까. 수행자가 아닌 사람은 세상과 중생의 이익·안락·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익·안락·행복, 자기식구와 내편의 이익·안락·행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다른 것이다.”

스님들이 사회참여를 하는 것에 대해 불교 내부는 물론 사회에서도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데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인생을 모르고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라는 것이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화쟁위) 위원장이자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인 도법스님의 얘기다.

화쟁위는 지난해 6월, 사회 갈등 현안과 종단 내외의 주요 사안에 대해 불교적 대안을 마련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됐다. 화쟁위의 명칭은 통일신라시대 원효대사의 화쟁사상을 따온 것이다. 화쟁사상이란 모든 대립적인 이론들을 조화시키려는 것으로 한국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낸 사상이다.

화쟁위는 설립과 동시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화쟁위에 선임된 위원들의 면모도 그러했지만 화쟁위가 설립되면서부터 다뤄야 할 의제가 종단의 뜨거운 감자인 봉은사 직영사찰문제와 사회적인 이슈로 국론의 분열까지로 치닫고 있던 4대강사업을 의제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화쟁위가 출범한지도 10개월이 지났다. 화쟁위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도법스님을 만나 화쟁위 활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아울러 스님의 출가이야기와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이야기, 불교관과 사회관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출가, 인생에 대한 회의

 

 

▲ 도법스님이 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도법스님은 출가 이유에 대해 특별한 사연은 없었다고 운을 뗐다. 스님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유복자다. 스님의 아버지는 제주4.3사건 때 돌아가셨다. 스님의 어머니는 홀로 3형제를 키웠다. 이념적인 색깔이 덧씌워졌던 상태에서 혼자 자식을 키워야 했으니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이 스님의 얘기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당연히 종교에 의지하게 됐고, 여느 시골 아주머니들처럼 기복신앙을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무속인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게 됐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막내는 스님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고들 한다. 그래서 집에서도 ‘막내는 스님이 됐으면 좋겠다’는 분위기였다.

스님은 그 당시 <원효대사> <사명대사> 등 스님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스님이 되는 것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스님의 출가는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는 것이다. 출가하는 날 스님은 어머니와 함께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갔다. 그때 스님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스님은 출가하고 2년 쯤 지날 즈음에 인생의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스님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스무 살 때인 것 같다. 그 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하러 사람이 절에 찾아 왔다. 그런데 그 당시 절집 분위기는 출가한 사람은 절대 세속과 관계하면 안 되는 것으로 대단히 무서운 분위기였다. 출가하면 부모ㆍ형제 그 어떤 인연과 관계해서도 왕래해서도 안 되는, 세속과는 모든 것이 단절돼야 했다. 그래서 전갈하러 온 사람을 아예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고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뒤에 친구처럼 지내지만, 마치 형 같은 스님이 저녁예불이 끝나고 법당 뒤쪽으로 도법스님을 불렀다고 한다. 그 스님은 도법스님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다고 하는데 네가 아무리 출가자이지만 어머니 아들인데, 위독하다고 소식이 왔음에도 어머니에게 가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심각하게 얘기했다. 스님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죽음의 문제가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70~80년이면 끝나는 허무한 인생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왜 죽는가, 이런 존재 이유에 대한 원초적인 문제에 충격적으로 부딪쳤다고 했다.

그때부터 스님은 비로소 인생에 대한 고뇌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님은 “그전까지는 내가 얼마나 바보스러웠는지, 내가 주체적으로 해 보거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인연이 되는 대로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문제에 봉착하면서 존재 이유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강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비로써 내가 존재에 대한 주체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면서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에 해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삶을 살더라도 그 삶은 허무하고 무의미 삶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스님은 그 물음을 갖고 살기 시작했다. 경전을 보고 법문을 들어도, 참선ㆍ기도를 해도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그런 생각으로 집중이 됐던 것이다.

◆화엄경과의 만남, 세상은 온통 거룩한 생명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을 늘 화두로 삼고 그 해법을 찾고자 했던 스님은 1980년대 초, 화엄경에 대해 뭔가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전에 10년 이상 선방을 다녔던 스님은 그 안에서 많은 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내 방식의 길을 찾겠다고 선방을 나와서 화엄경을 만났고 화엄경을 보면서 ‘이 우주는 유기적 생명공동체로 생명들의 활동이 이 세상의 전부다. 화엄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님은 “세상은 생명 아닌 것이 없다. 온통 거룩한 생명으로 이뤄졌다. 어떤 이유로든지 생명의 존엄성이 함부로 취급돼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평화 자유 정의 국가 종교 이념 또 다른 이해타산의 이름으로, 내가 아닌 남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고 내편이 아닌 상대편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결과 우리나라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좌우대립ㆍ동족상잔ㆍ남북대립으로 나타난 것이고 그 이후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 불교와 기독교로 편을 갈라 싸우고 있다는 것이 스님의 견해다.

스님은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돕고 나누면서 살아야 되는 것인데 생명의 법칙과는 전혀 반대로 역사가 이뤄진 것이다. 너무나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이다. 화엄경을 만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잘 모르고 잘못 살고 있다”는 그런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됐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논리가 전혀 맞지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정의의 이름으로 분노해야 된다고 얘기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싸워야 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환경ㆍ시민운동이다. 이런 운동이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스님이 고민하던 것을 조금씩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스님은 지리산 실상사에 와서 살게 됐고, 거기서 살면서 지리산의 아픔, 민족의 아픔 이런 상처들을 훨씬 더 구체적으로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그래서 스님은 당시 범종교ㆍ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생명평화ㆍ민족화해ㆍ평화통일을 위한 ‘좌우대립 지리산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하게 됐다.

스님은 “이제 남과 북은 어떤 이유로든지 생명ㆍ인간의 존재로, 민족구성원으로 만나야 한다. 좌우 진보ㆍ보수 여야 기독교ㆍ불교 등은 다 지엽적인 것이다. 본질이 아니다. 근본을 제대로 보자. 거룩한 생명ㆍ인간의 존재로, 같은 민족구성원으로서 함께 만나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이런 것은 결국 불교세계관과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을 역사 속에서 짚어보면 원효의 ‘화쟁사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스님은 화쟁사상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그 사상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접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왔다. 그런 차제에 조계종단이라는 제도권에서 ‘화쟁위원회’를 만들었다. 화쟁사상을 갖고 불교의 내부문제, 나아가 사회ㆍ시대의 문제를 풀어나갈 해법을 찾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내 관심분야고 줄기차게 고민했던 문제였기 때문에 화쟁위 위원장을 조건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내가 화쟁위에 들어올 때 주위에서 말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때는 현 총무원장스님의 등장 초기였고,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잘 몰랐다. 난 그런 것과는 관계없다. 내가 30년 세월, 화쟁사상을 화두처럼 붙잡고 천착해 왔다. 한국ㆍ민족사회와 21세기 현대사회에 화쟁을 담론화하고 문화화하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에 화쟁위에 참여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운동권 차원에서 펼치던 화쟁사상을 제도권에서 하겠다고 해서 스님은 사심 없이 동참했다는 얘기다.

화쟁위 활동, 아쉽지만 의미 있고 유익

 

▲ 도법스님은 “화쟁위를 욕하고 나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누구든지 직접 만나 사실을 짚어보자”고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화쟁위의 활동 결과에 대해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그러나 스님은 “화쟁위에 대한 평가는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고 말하고 있다. 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 이런저런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다는 뜻이다.

스님은 “화쟁위를 욕하고 나를 원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봉은사 문제에 대해 명진스님이라든지 명진스님을 좋아했던 사람들, 진보 진영에서 원망ㆍ비난ㆍ불만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다. 명진스님이 됐든, 누구든지 직접 만나 사실을 짚어보자. 본인들이 승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3자가 들어보면 누구의 말이 일리가 있고 경우가 있는가를 알 것이다. 봉은사 문제를 놓고 봤을 때, 화쟁위가 총무원장스님의 앞잡이 역할을 했다는 등 온갖 얘기가 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떳떳하다.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화쟁위와 스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뒤에서 얘기하지 말고 공개적으로 만나 대화하자는 뜻이다. 잘못한 것이 합리적으로 짚어진다면 당연히 사과하겠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필요하다면 화쟁위 위원장도 그만 둘 수 있다는 입장이다.

스님은 화쟁위 활동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스님은 “내 능력이 부족해 일을 충분히 못한 것이 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좀 더 낫게 할 수 있었는데 원장스님보다는 총무원 집행부 식구들과 명진스님을 비롯한 봉은사 식구들이 화쟁적으로 문제를 풀어 보려는 진정성을 갖지 못하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다루다 보니 아슬아슬한 상황이 생겼다. 이런 상황을 관리하다 보니 정작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첨예한 문제, 아무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고 ‘불가능하다’고 얘기한 부분을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내 큰 탈 없이 정리했다”면서 종단이나 봉은사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런 점에서 봉은사 문제는 괜찮게 됐다고 스님은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까지 직영사찰은 재정을 염출하는 사찰로 인식되고 운영해 왔는데 봉은사 문제를 해결하면서 직영사찰을 종단의 모범사찰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고 실제로 그 역할을 해야 된다는 공론을 만들어 낸 것은 굉장한 성과라고 스님은 의미를 부여했다.

4대강 문제도 ‘정부의 들러리를 서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다고 스님은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 반대대책위 야당 종교계 등이 함께 하고 종교계가 중재 역할을 해서 첨예한 문제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민이 화합하고 사회가 통합될 수 있도록 절충점을 찾자보자고 해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활동을 했다고 스님은 평가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너무 늦게 활동을 시작해 그 자체가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화쟁위 활동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조계종단이 ‘5대 결사’를 천명한 것은 화쟁위의 활동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스님은 “봉은사 문제는 그 자체로 정리됐고, 4대강 문제는 비록 해답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단이 자기 길을 제대로 가겠다는 것과 세상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해 그런 방향과 기조로 가고 있다. 이렇게 된 것도 화쟁위의 활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많은 한계와 아쉬움이 있었지만 충분히 의미 있고 유익한 활동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지난해 8월 영산강 개발현장 죽산보를 찾은 화쟁위 위원들이 현장 관계자로부터 공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올해 화쟁위 추진 방향
화쟁위는 올해에도 바쁘게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시급한 현안문제보다는 한국사회에 내재돼 있는 갈등요소를 화쟁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제를 선택했다.

그 첫째는 ‘종교갈등을 넘어 종교평화’라는 의제다. 이는 불교계가 먼저 자기 원칙을 바로 세우고, 이웃종교?시민사회와 함께 한국사회의 종교평화를 구현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남북문제’다. 지금까지 남북문제는 정파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다뤄왔다. 남북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 때문에 우리사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갈등해 왔다. 적어도 남북문제만큼은 민족의 운명이 걸리고 더 크게는 동북아평화와 인류평화와 직결된 문제다. 정파를 넘어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ㆍ사회적으로 남북문제의 기본적인 방향과 기조를 통합적으로 갈 수 있도록 해서 누가 집권해도 같은 방향과 기조를 유지하면서 남북문제를 다루자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사상인 원효의 화쟁사상을 우리 사회의 담론이 되게 하고 문화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그에 대한 일차적인 실천방안이 화쟁실천 활동가를 양성하는 ‘화쟁리더십아카데미’다. 또한 포럼 및 문화적인 활동을 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스님은 “삶이 수행이고 수행이 삶이다. 스님들이 수행의 혁명을 통해 삶과 수행이 통일될 수 있는 수행론과 불교관을 확립해 내는 것이 스님들이 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 생각한다. 재가자들은 스님을 통해 불교를 만나고 배운다 하더라도 불교에 대해 더 주체적인 입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스님에게 너무 의지하거나 종속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스님과 재가불자들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세상 모든 사람은 존귀한 존재’라는 것과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말씀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되새겨 보고 실천한다면 이 세상은 불국정토가 될 것이다. 한발 앞서 도법스님은 이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 “세상과 중생의 이익ㆍ안락ㆍ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요, 재가들의 삶”이라는 스님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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