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영 대표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0.7.30
이석영 대표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0.7.30

‘이항복의 10대손, 30세에 과거 급제’
‘독립군 사관 양성… 신흥강습소 개교’
‘정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천지일보 천안=박주환 기자]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이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석영을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전시회는 8월 한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관련 자료 7점을 전시한다.

이석영은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으로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30세가 되던 1885년 과거에 급제했다. 이후 승지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며 고종을 보필하다, 1904년 벼슬을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동생 이회영이 국권수호운동에 나서자 이석영은 자신의 소유인 남산 쌍회정을 모임장소로 제공하는 등 이회영의 활동을 지원했다. 국외 무관학교 건립을 위해 서간도를 답사하고 온 이회영이 경술국치 직후 이석영에게 망명을 제안하자, 형제들과 뜻을 모아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 60여 명과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가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집단 망명에는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큰 역할을 했다.

중국 서간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한 이석영 6형제는 독립군 기지건설에 착수했다. 이석영은 1911년 4월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耕學社) 설립에 참여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이석영의 자금 지원으로 독립군 사관 양성 학교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개교했다.

이석영은 1912년 신흥강습소가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해 중등과정을 신설하는 등 교세를 확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교주(校主)를 맡아 학교 경영에 나서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이석영은 서간도를 떠나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며 생활했다.

독립군 양성에 일생을 바친 이석영은 1934년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 제 2호.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0.7.30
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 제 2호. (제공: 독립기념관) ⓒ천지일보 2020.7.30

한편 이석영을 비롯한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가로 포상받았다. 그중에서도 넷째 이회영(1867년~1932년, 1962년 독립장)은 1907년 신민회를 결성해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했으며, 아나키즘을 수용하며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다섯째 이시영(1869년~1953년, 1949년 대한민국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약했고,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냈다. 이석영 6형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조상 대대로 내려온 권세와 재산을 포기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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