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6.25전쟁을 공모했던 (왼쪽부터)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 ⓒ천지일보 2020.7.16
6.25전쟁을 공모했던 (왼쪽부터) 전범 김일성, 공범 마오쩌둥, 교사범 스탈린. ⓒ천지일보 20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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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10화>

6.25전쟁의 민족사적 재정의와 국제법상 전쟁범죄적 재론(再論)

올해는 6.25전쟁 발발 제70주년이 되는 해로서 남다른 감회가 드는 것은 최근 구국의 영웅 백선엽(白善燁) 대장이 향년 100세로 서거(逝去)하셨기 때문이다. 고인이 북한공산군의 불법남침에 맞서 셀 수도 없는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한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위대한 군인이었다는 것은 이제 영원한 신화가 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정치모리배들에 의해 친일 프레임에 시달린 점은 구국의 영웅에 대한 감히 있을 수 없는 결례(缺禮)라는 점을 역사의 진실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6.25전쟁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으로 정의돼있다. 그런데 이 전쟁의 책임소재에 관한 진실에 벗어난 정의이기 때문에 ‘잘못 됐다’고 할 것이다. 민족사적 의미로 정확한 정의는 “김일성이라는 희대의 공산주의자가 해방 후 북조선을 해방구로 전쟁을 준비해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의 권력욕을 숨긴 채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겠다는 망상에서 저지른 민족사 최악의 동족상잔”이라 해야 맞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해방 후에 누구도 전쟁을 꿈꾼 지도자는 없었다는 점과 김일성(당시 38세)의 6.25전쟁 전후 전쟁지도(戰爭指導)의 행적을 추적해 숨겨진 전쟁범죄적 진실을 밝혀서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6.25전쟁이 김일성에 의해 발생한 민족사회와 국제사회에 대한 참혹한 비극이었으며, 수백만 인명의 살상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전쟁범죄(war crimes)’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범재판조차 없이 전범 김일성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은 유감스럽다. 평화통일 후 그자의 범죄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더라도 재론할 과제일 수도 있다.

추가적으로 6.25전쟁의 유념해야 할 관점은 국제법상 종전(cease fire)이 아니라 정전(armistice)이라는 현 상황이 언제라도 선전포고(declaration of war)없이 북한의 기습으로 개전(open war)이 가능한 전쟁 중(on war)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북한이 다시는 전쟁을 안할 것이고 평화를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기대로 국가안보의 긴장을 스스로 해체하는 것은 자멸(自滅)의 길이니 항재전장(恒在戰場)과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자세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야한다.

6.25전쟁의 요건과 원인으로 본 전쟁의 성격

‘전쟁의 요건’에 관해 서상문 박사는 ①개전의 의지를 가진 국가지도자의 전쟁개시 명령의 유무 ②동원된 무장병력의 수가 정규군 연대급 이상의 유무 ③상대방의 무장행위가 2주 이상 충돌이 지속되고, 1명이상 사상자의 발생유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논점에서 6.25전쟁은 전쟁의 요건이 충족된다. 멜빈 스몰(Melvin Small), 데이비드 싱어(David Singer)의 주장은 ▲전투의 지속성(sustained combat) ▲조직화된 무장세력(국가)의 개입 ▲12개월 기간 중 전투와 관련해 최소 1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전투가 있어야 전쟁으로 인정한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전쟁의 원인’ 측면에서는 ①국가지도자의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에 따른 상관성 ②대외무력행위를 국가 위세의 지도력 장악으로 보는 관점 ③사회적으로 국가사회가 처한 실정에 따른 ‘식민지 상태에서의 민족해방전선, 노예해방에 대한 남북전쟁, 분단극복을 위한 국가통일 전쟁 등’ 다양한 원인을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사회 측면에서는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의 글로벌 이니셔티브(주도권, 主導權) 쟁탈전이 원인이 된다. 따라서 6.25전쟁은 이 모든 전쟁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동시 작용한 내전 ‘civil war(시빌 워)’와 국제전 ‘world war(월드 워)’의 ‘복합형전쟁’이었다.

6.25전쟁과 전쟁지도자의 비교평가

‘전쟁지도(戰爭指導)’라는 용어는 부재적인 개념이나 전쟁리더십(war leadership), 작전지휘(operational commanding), 작전통제(operational control)를 함의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쟁지도’라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 의미로써 통합된 전쟁수행역량과 기술을 의미하는 포괄적 개념으로서 전략(strategy)의 입안-실행-수정-새로운 계획입안-실행-수정의 지속적 반복되는 전쟁행위와 구상(thoughts and concept of action in war)인 것이다.

따라서 6.25전쟁을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접근 방법은 전쟁지도자의 언행(의지, 구상, 발언, 정책, 전략, 결정, 지시, 조치, 수행 등)과 그 모든 것을 망라한 전쟁지도(conduct of war)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자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과 민주진영의 전쟁지도자 이승만, 트루먼, 맥아더의 전쟁지도를 비교평가는 것 자체가 매우 유의미하다.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관념

김일성은 해방 후 소련군의 후원으로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34세)로 정치지도자로서 정권(政權)을 잡았고, 1948년 조선인민군 창설 최고통수권자(37세)에 취임해 군사지도자로서 군권(軍權)을 장악했다. 그 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37세)에 등극해 정치군사지도자로서 전쟁지도의 주체가 됐다.

김일성은 해방이전에 통일 조국에 대한 개인적인 구상을 했으며, 평화통일을 결코 믿지 않았고 시종일관 무력수단을 통한 ‘조국통일구상’을 주장했다고 유성철(전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김일성과 항일유격대 참가자)씨의 1992년 4월 12일의 회고가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김일성은 민족진영출신이 아닌 소련군에 편승해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세력이 취약해 ‘무력’에 의존했으며 남한에 대한 정치적 통일도 ‘무력지상주의적 관념’을 소유했다는 박갑동(책‘한국전쟁과 김일성’, 1990년)의 증언이 있다. 또한 김일성은 1946년 6월 전후로 지도급 인민군 군간부들에게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겠다며 군사력 건설사업에 관해 중점적인 발언을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러한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관념’은 해방 후 남북분단의 현실을 ‘자주적 민족해방’이라는 민족통일국가에 대한 망상(妄想)으로 형성되면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공을 염두에 둔 통일구상이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 김일성(39)의 모습.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6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 김일성(39)의 모습.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6

김일성의 전쟁지도와 대소(對蘇)·대중(對中) 군사지원 외교행위

김일성의 ‘무력통일 지상주의적 망상’이 전쟁지도로 실행된 것은 적극적인 대소(對蘇)군사지원 외교 행보였다. 김일성은 제1차 소련 방문(1949년 2월 22일~3월 24일) 중 3차례에 걸친 스탈린과의 북·소회담(3월 5일, 7일, 14일)에서 대남 무력통일 구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한군을 속전속결로 제압할 수준이 부족하고,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즉각 개입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미·소간 얄타협정(1945년 2월)이 유효하다는 점을 들어 선제남침공격을 반대했다. 그런데 스탈린은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략하라는 식의 전쟁지도 발언을 통해 김일성의 무력통일구상을 조건부 동의해줬다.

이와 같은 스탈린의 조건부 동의는 ‘민족해방전쟁’이라는 ‘반제국주의 프롤레타리아 공산사회주의 혁명노선’과 일치하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남침논의는 철저히 은폐했으며, 대북 군사지원 규모가 확대되는 결정적인 전쟁지도를 해준 것이다. 스탈린의 조건부 승인을 획득한 김일성은 귀국 후 본격적인 남침준비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제2차 방소(1950년 3월 30일~4월 25일)는 비밀리에 추진됐으며, 스탈린은 4월 10일 21시 10분부터 23시까지 김일성을 만난 자리에서 남침전쟁을 승인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미군의 한반도 철수(1949년 6월 30일)로 변화했고, 중공의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대륙을 통일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공산화(共産化)’를 위해 적극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 이 비밀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에 김일성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사회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염전분위기이고, 북한군이 신속히 전개해 전쟁을 3일안에 승리로 끝낼 수 있다. 남조선 노동당 당원 20만 명이 남한에서 봉기를 해 참여할 것”이라는 답변을 했다.(김성호, ‘조선전쟁의 비밀과 진실’, 2001년)

그리고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지도를 해줬는데 먼저 철저한 전쟁준비를 위해 부대를 추가적으로 창설할 것과, 정예공격사단을 편성하고 더 많은 무기와 장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특히 남한의 공격을 유도해서 그것을 빌미로 반격하면서 전쟁을 확대하라는 구체적인 기만전술(欺瞞戰術)을 지도해줬고, 남침작전을 3단계로 구획해 38도선에서 남해안까지 작전종심 350㎞를 한달 만에 점령해 작전을 완료하라는 지도를 해줬다. 둘째로 위장평화전술로써 남한에 평화통일 제안을 해 ‘전투와 군사행동’은 철저히 은폐하도록 지도했으며, 셋째 공격작전은 속전속결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넷째 중공과의 군사지원을 연대해 마오쩌둥의 동의를 받으라는 조건부 승인을 하면서 “중공을 믿고 의지할 필요가 있고, 소련은 직접 개입이 불가하다”는 방침을 통보했다. 따라서 6.25전쟁은 스탈린의 교사에 의한 김일성의 전쟁범죄라는 연관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전쟁개입 공범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김일성은 대중(對中)군사지원 외교행보에도 집요한 노력을 했다. 제1차 방중(1949년 4월 28일)에는 김일성을 대신해 북한 민족보위성 부상 김일이 방문해 방소회담 결과를 보고했고,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남침전쟁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남침전쟁이 시기상조라는 불가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전쟁지도에 관해 속전속결의 중요성과 지구전의 불리한 점을 언급했고, 중공군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모호한 언질을 줬으며,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3개 한인사단 중 2개 사단을 북한군에 편입하도록 승인해 줬다.

제2차 방중(1950년 5월 15일)에서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5월 14일 스탈린의 특급전문을 확인한 후 김일성의 대남전쟁 도발에 동의했으며, 북한의 무력침공 기본구상을 지지하면서 전쟁지도를 해줬다. 마오쩌둥의 전쟁지도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다면 중공은 군대를 파견해 북한 지원을 약속 ▲중공의 군사대응전략으로 동북 3성 근처 압록강변에 3개 군단을 배치 ▲미군이 38도선을 넘어오지 않으면 관여하지 않겠지만 일단 38도선을 넘으면 반드시 인민지원군을 투입 등이었다. 이처럼 6.25전쟁은 단순히 북한 김일성의 개인적인 군사도발이 아니라 공산진영 소련과 중공의 군사적 지원 공모 하에서 자행된 ‘범죄전쟁(criminal war)’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김일성은 민족사에 비극적 범죄를 저지른 ‘전범(war criminal)’이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11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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