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한이 같은 민족을 향해 전쟁을 일으킨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어느덧 전쟁을 겪은 세대는 사라져가고 6.25전쟁의 진실은 전후세대에게 잊혀져가는 전설이 돼가는 안타까운 시대이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6.25전쟁의 진실을 쉽게 풀어쓴 ‘6.25전쟁 이야기’를 연재한다. 이 연재를 통해서 조국 대한민국이 어떻게 지켜졌으며, 어떻게 싸워 이겼는가를 기억하고자 한다.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 ‘제2부 지연전과 낙동강전선 방어’ ‘제3부 반격과 공방전 및 휴전’으로 구성한다.

1950년 7월13일 유엔기를 인계받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0
1950년 7월13일 유엔기를 인계받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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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년 기획 - 제1부 6.25전쟁 전야와 개전초기 전투상황<9>  

유엔군사령부의 창설과 초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한반도의 전쟁이 치열하게 달아오른 7월초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7일 제3차 결의로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and)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의 주요내용은 유엔이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할 권한을 미국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체제 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당일 유엔 주재 미국 오스틴 대사에게 유엔기를 전달했고, 미 합동참모본부(미 합참)는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cArthur) 극동군사령관을 추천해 8일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공표했으며, 10일에는 정식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발송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우선 극동군사령부(FECOM)를 통해 유엔군의 작전통제권( Operational Authority)을 행사했으며, 초기에는 극동군사령부의 참모들이 유엔사령부의 임무를 이중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구성군인 미 제8군사령부(지상군), 미 극동해군사령부, 미 극동공군사령부를 중심으로 육군·해군·공군의 작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맥아더 원수는 7월 12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중장에게 ‘7월 13일부로 주한 미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라’는 구두 명령을 하달해 대구(현 Camp Walker)로 지휘소(CP)를 개소시켰다.

그리고 1950년 7월 14일에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作戰指揮權)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맥아더 장군에게 공한(公翰)으로 이양(移讓)되면서, 17일 제8군사령관과 미 극동 해·공군사령관에게 그 권한을 위임해 지휘체계가 수립됐다.

이 대통령은 공한에서 “본인은 현재와 같은 적전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며, 이에 준한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한국 내 또한 한국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하며, 기타 사항도 사령관이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이양의사를 전했으며, 이에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본관은 용감무쌍한 대한민국 국군을 본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두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라고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의 전환(transfer)을 공식화했다. 이 결정은 현재의 전시 작전통제권(Wartime Operational Control)과도 연계된 역사적인 결정으로 한미동맹의 뿌리가 돼 한반도 전쟁억지력과 안정에 기여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 ⓒ천지일보 2020.7.10
맥아더 장군. ⓒ천지일보 2020.7.10

이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7월 17일 워커 장군에게 한국군(ROKA)의 작전지휘권도 행사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개전초 전투력과 전투경험이 부족한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포기하고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하에 ‘지휘통일(Unity of Co㎜and)’을 구축한 것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지도(戰爭指導)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3군총사령관 정일권 소장은 주요 지휘관(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 / 제2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참모들에게 미군의 참전에 따른 연합작전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음을 강조했고, 이를 각 사단장들에게 하달해 무리 없이 지휘통일을 확립한 것은 최고의 지휘판단이었다. 그러나 실제 작전에 있어서는 미 8군사령관의 작전통제가 요청되면 한국군 육군본부의 지휘계통으로 예하부대에 명령과 지시가 하달돼 작전지휘권을 연합차원에서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원칙적으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미 육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구성군 부대로 편입한 한국 육군을 지휘했다. 그리고 미 극동해군사령관은 한국해군을 포함한 유엔사해군구성군을, 미 극동공군사령관은 한국 공군을 포함한 유엔사공군구성군을 지휘하는 연합작전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영국의 애틀리 수상은 6월 28일 일본 수역에 있는 영국해군함정을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지휘권에 통합시켰고, 호주·뉴질랜드·캐나다 정부가 영국정부의 결정에 합류하면서 연합군 지휘부의 필요성이 대두됐으며, 7월 7일 유엔안보리에서 유엔군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돼 7월 24일 동경(東京)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역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United Nations Co㎜and)가 발족된 것이다.

<TIP> 초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누구인가?

맥아더(1880.1.26~1964.4.5)는 미국 아칸소주의 리틀록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집안은 스코틀랜드계였다. 1899년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를 입학해 1903년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해 공병대에 배치됐다. 1918년 제42보병사단 예하부대인 제84여단의 여단장으로 지휘를 맡아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1919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해 미국 웨스트포인트 교장으로 취임해 1920년 정식 육군 준장이 됐다.

1930년 샌프란시스코에 주둔하는 미국 제9단장이 됐으며 그해 11월 30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해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1937년 퇴역해 예비역 대장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7월 26일 맥아더는 군사고문에서 육군 소장으로 현역에 복귀해 다음날 중장으로 승진해 미 극동군사령관(FECOM)이 됐다. 1944년 원수가 됐고,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으며 이승만 대통령과는 각별한 친분관계로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는 등 한국군을 지원하고, 유엔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해임됐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인천자유공원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월미도를 바라보고 서 있다.

국군의 재편성과 군단 증편

유엔사령부가 창설될 시기를 전후로 국군 내에서도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정일권 총참모장의 지휘 하에 재편성 작업을 추진했다. 특히 서울을 실함하고 사분오열한 장병을 수습해 한강방어선전투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국군은 건제를 편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먼저 7월 7일 제3사단, 제5사단, 제7사단을 재건했으며, 중동부전선의 제6사단과 제8사단에 대한 원활한 작전통제를 위해 7월 12일 함창에서 제2군단사령부(군단장 김백일 준장)를 창설했다.

국군은 제1군단·제2군단 체제로 증편해 패퇴했던 개전 초의 분위기를 쇄신하고, 미 육군 제24사단과 추가로 전개한 미 제25사단과 제1기병사단과의 연합작전을 준비했다. 지형적 특성을 고려해 추풍령을 중심으로 차량과 장비가 많은 미군은 서쪽지역의 평야지대를 책임지고, 한국군은 상주-영동지역의 중동부지역의 산악지대를 방어하는 것으로 전선을 조정했다. 7월 24일에는 다시 육군의 지휘체계를 재조정해 제1군단이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해 영주-안동축선을, 제2군단은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지휘해 문경-함양-상주축선을 방어하도록 하고, 태백산맥으로 지휘통제가 어려운 제3사단은 육군본부 직할로 편성했다.

스미스 TF의 죽미령 전투 패배와 미 제24사단의 천안전투 연패와 설욕(雪辱)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미 제24사단의 선발대인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7월 1일이었다. 미 스미스특임부대(Smith TF)는 7월 5일 03시에 죽미령에 도착했다. 미 제24사단의 선발대로서 미 지상군부대의 최초의 부대로 제52야전포병대대 A포대(105㎜ 곡사포 6문)와 함께 오산 북쪽의 죽미령(竹美嶺)에 전개했다.

죽미령은 오산 북방 약5㎞ 지점의 경부축선상의 조그마한 횡격실 능선으로서 중앙에 주봉인 반월봉(117m), 서측에 무명고지(90m), 동측에 92고지로 3개 고지군으로 형성돼있다.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대대는 비가 내리는 새벽의 어둠속에서 즉각 진지구축에 들어갔지만 해 뜰 무렵까지도 완료하지 못해 전투준비가 미흡한 상태였다.

7월 3일 오산 죽미령전투(5일)에 투입하기 위해 대전역 도착하는 스미스특임부대(Smith TF).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0
7월 3일 오산 죽미령전투(5일)에 투입하기 위해 대전역 도착하는 스미스특임부대(Smith TF). (제공: 장순휘 박사) ⓒ천지일보 2020.7.10

5일 07시경 수원부근에서는 서울을 점령했던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7전차연대가 제1제대로 공격해 1번 경부국도를 따라 남진하는 것이 관측됐다. 8대의 전차를 선두로 죽미령 1.8㎞까지 접근하자 미군은 수청리에 배치한 105㎜ 곡사포로 선제공격을 했다. 그러나 전차의 돌진은 계속됐고, 보병진지 630m까지 들어왔을 때 75㎜ 무반동총으로 전차를 공격했으나 적 전차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어서 지근거리에서 2.36in 로켓포 공격을 실시했으나 별효과가 없었고, 북한국은 08시 30분경 죽미령방어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미군의 보포협동공격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전차는 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면서 4대씩 33대가 모두 죽미령을 통과해 A포대쪽으로 접근했다. 전차가 통과한 후에 보병부대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 스미스대대는 비가 오는 가운데도 계속 호를 깊이 파는 등 진지강화를 했다. 11시경 전차 3대를 선두로 적이 보전협동 공격을 해왔기에 반월봉을 중심으로 전면방어로 전환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동측방의 C중대가 위험하게 되자 14시 30분 대대장 스미스 중령은 철수를 결심했다.

스미스대대는 죽미령전투에서 모든 공용화기를 유기하는 등 엄청난 전투손실을 입었다. 스미스부대원의 전사, 부상, 실종을 합해 총 150여명의 인명피해가 났고, 제52포병대대 A포대는 화포를 포기하고 철수하는 치욕을 당했다. 반면에 북한군의 손실은 사망 42명, 부상 85명, 전차 파손 4대였다. 비록 죽미령 전투가 미군과 북한군과의 첫 교전이었으나 북한군이 미군의 참전을 확인한 전투로서 북한군 수뇌부를 놀래게 만든 전투였다. 스미스특임부대가 패배한 원인을 볼 때 제2차 대전이후 안일에 빠진 미국의 군대는 장비와 훈련 면에서 기강해이의 길을 걷는 시기였으며, 미군엔 북한군을 우습게 생각한 자만(自慢)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산 죽미령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 미 제24사단 제34연대가 평택-안성에 제2저지선을 구축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죽미령 전투에서 미군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노도와 같이 전차를 앞세우고 제34연대 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북한군 전차공격에 압도된 제34연대 장병들은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6일 아침 1시간 만에 평택-안성 방어선을 포기하고 천안으로 철수를 강요당하는 패전이었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 제24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제34연대를 공주방면으로 철수시키고, 제21연대를 조치원 북방으로 투입했다. 그러나 북한군 전차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또 7일 아침 패배를 당했고, 충격 속에서 딘 소장은 제34연대 3대대를 천안으로 철수시켜서 방어했으나 전차를 앞세운 적 제4사단의 보전협동공격에 돌파돼 천안 시가전까지 벌였다. 이후 8일 오전에는 공주를 따라 금강으로 철수시켰다.

많은 피해를 입은 미 제24사단은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철수하던 중 7월 9일 20시경에 북한군의 대규모 남진하는 대열을 발견하고, 공중공격으로 평택과 조치원을 연결하는 도로에서 100여대의 북한군 차량을 파괴했다. 10일 오후에는 평택부근에서 파괴된 교량 앞에서 길게 늘어선 북한군 전차와 차량 대열은 미 제5공군이 대규모 공중공격으로 적 T-34 전차 38대, SU-76 자주포 7대, 트럭 117대를 파괴했고, 다수의 병력을 살상하는 설욕을 했다.

오산 죽미령 전투와 평택-안성 방어선에서 북한군에게 패배를 당한 미 제24사단은 충격에 빠졌으며,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첫 대패(大敗)였다. 그리고 미군 지휘부 생각을 크게 바꾼 첫 전투였다. 미 제24사단장도 천안전투에서 패퇴하면서 105㎜ 대전차포탄과 3.5in 로켓포를 긴급 요청해 북한군의 대전차무기를 보강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군은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해 북한군의 공격속도를 둔화시켰고, 병력을 살상해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지연전으로 작전개념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제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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