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어떤 이유로도 전쟁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고대의 사상가 묵자가 비공(非攻) 즉 남을 공격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주창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수보다 앞서서 조건 없는 사랑인 겸애를 주장했다가 맹자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로 군사조직을 구성하고 이유를 불문하고 공격을 받은 나라를 지원했다. 영화 묵공(墨攻)은 그 이야기이다. 전쟁은 미치광이들의 놀이일 뿐이다. 온갖 명분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키지만 모두 미친 짓에 불과하다. 군사학의 대가 손자도 최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영국의 군사평론가 리델 하트도 최고의 전략은 전쟁을 피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지휘관이 훌륭한 전쟁수행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러나 군대 통솔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건은 정치성이다. 프로이센 출신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전쟁은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는 정치의 연속이라고 규정했다. 레닌은 전쟁론의 종지(宗旨)를 공산혁명에 그대로 적용해 당과 군대와 인민을 하나의 조직으로 만들었다. 중국군대는 지금도 정치요원이 부대에 상주하며 군대를 이끌고 있다. 레닌은 군대의 정치성을 간파했다.

탁월한 군인이었지만 정치적 안목의 부재로 패하거나 승리한 후에 오히려 피해를 입은 장군도 많았다. 대표적 인물이 중국의 악비, 조선의 이순신, 미국의 맥아더이다. 이들의 군사적 능력은 혁혁한 전공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악비는 고토수복, 포로로 잡혀간 두 황제의 송환, 이민족 격퇴라는 전략적 목표를 제시하고 주전론을 펼치다가 황제의 정치적 이익과 배치되었기 때문에 피살됐다. 이순신은 불패의 상승장군이었지만 전쟁을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선조와 문신들의 뜻을 저버리고 후퇴하는 적을 섬멸하려다가 아쉽게도 전사했다. 맥아더는 중국의 개입을 우려한 트루먼과 맞서서 확전을 주장하다가 해임되고 말았다. 당말에 신라인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유명해진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반란군은 양자강을 건너 북상을 하다가 관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했다. 추격하면 반란군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었지만, 관군의 장군들은 추격을 중지했다.

“정치가들은 나라가 위급하면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지만, 평화가 도래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헌신짝처럼 내버린다. 내가 살려면 적을 살려두어야 한다.”

조송(曹松)은 이 일화를 소재로 다음과 같은 ‘기해세(己亥歲)’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택국강산입전도(澤國江山入戰圖), 생민하계락초소(生民何計樂樵蘇).

빙군막화봉후사(憑君莫話奉侯事),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천하가 전란에 휩싸였으니, 백성들이 나무하고 풀 뜯는 일이라도 즐길 수 있으랴?

부디 제후가 된다는 말을 하지 말게나. 한 장군이 공을 이루면 수많은 해골이 나뒹군다네.

역사는 승장이나 패장을 가리지 않고 약간의 기록을 남기지만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군사들과 백성들의 원혼은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장군의 혁혁한 전공은 군주를 두렵게 한다는 말처럼 장군의 공이 클수록 정치가와의 갈등은 더욱 심해진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누구도 견주지 못할 공을 세웠으나, 최영을 비롯한 보수적인 정치가들의 견제를 받았다. 결국 그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북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진격하다가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고려왕조를 무너뜨렸다. 궁예의 신하였던 왕건이 뛰어난 전공 때문에 견제를 받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고려왕조는 인과응보처럼 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망했다. 왕건과 이성계는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치군인이었다. 그들에게 정치적 감각이 없었더라면 결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무력은 외부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내부로도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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