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이순신과 의병, 조선을 구하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을 구한 것은 이순신과 의병이었다.

왜군의 작전은 수륙병진책이었다. 육군은 부대를 세 갈래 방향으로 나누어 북상하고, 수군은 서해로 진입해 조선을 협공한다는 전략이었다.

수군이 서해안 뱃길을 따라 강화도 부근에 도착하면, 한강과 임진강을 통해서 한양과 경기도 일대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대동강과 압록강 기슭에 이르면 평양과 의주 방어는 속수무책이었다.

실제로 1592년 6월 15일에 평양에 입성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의주에 있는 선조에게 서한을 보내 “이제 일본 수군이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진입해 오기만 하면, 의주에 총공격을 개시할 것인데 대왕의 수레는 어디로 갈 것이냐?”고 협박했다.

하지만 일본 수군은 대동강은커녕 서해도 진출하지 못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혹시 모를 전란에 착실히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에는 거북선에서 화포를 쏘는 훈련을 하였다.

5월 초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까지 나가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격론 끝에, 이순신은 5월 4일 여수를 떠나 거제도로 향했다.

5월 7일에 이순신은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만났다. 그는 전투에 앞서 이렇게 명령했다.

“함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조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물령망동 정중여산 勿令妄動 靜重如山).”

그리하여 화포와 당파전술로 왜선 26척을 분멸시켰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이어서 5월 29일에는 거북선이 출전한 가운에 사천·당포·당항포 전투에서 연승했다.

7월 8일에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으로 왜군을 크게 이겼다. 이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과 싸우지 말도록 명령했다. 9월 1일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본영인 부산을 공격해 적선 100여척을 불태웠다.

이렇게 4차에 걸친 10번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육지에서는 각 도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당시 삼도(三道 충청·전라·경상)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들은 모두 백성의 인심을 잃고 있었다. 관아는 병정과 군량 징발을 독촉해 백성들이 밉게 보았으며, 게다가 관군은 왜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해 달아났다.

그러자 도내(道內)의 명문거족과 유생 등이 창의(倡義)해 일어났고, 원근(遠近)에서 의병에 지원했다.

비록 의병들은 크게 이긴 것은 없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됐다.

호남의 전 동래부사 고경명과 전 수원부사 김천일, 영남의 유생 곽재우와 전 장령 정인홍과 전 좌랑 김면, 호서(湖西)의 전 제독관(提督官) 조헌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런데 관군과 의병은 서로 갈등을 일으켰고 대부분의 수령과 병사들은 의병장과 화합하지 못했다. 다만 초유사 김성일은 요령 있게 잘 조화시켰기 때문에 영남의 의병이 그 덕분에 정중하게 대우를 받았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및 ‘연려실기술’).

선비들은 충군애국(忠君愛國)으로 붓 대신 칼을 잡았다. 민초들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다. 그런데 도망쳤던 수령과 병사들은 의병들을 시기하고 모함했다. 나라는 누가 지켰나?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