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도산(島山)이 거주하고 있던 평양 지역은 6월 28일 일제히 검거령을 내려 도산도 이날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서(京畿道警察署)에 구금되었으며, 다른 회원들은 평양서(平壤署)에 구속되었다가 다시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한편 경기도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도산은 종로경찰서 유치장(鐘路警察署留置場)으로 8월 10일 이감(移監)되었다가 다시 11월 1일 서대문 형무소(西大門刑務所)로 41명과 함께 이감되기에 이르렀다.

서대문형무소의 차디찬 감방에서 도산의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일제는 재판 도중인 12월 24일 병보석으로 경성대병원(京城大病院)에 입원시켰다.

일제는 병보석의 명분으로 폐결핵 및 결핵성 참출성 복막염이라는 병명을 붙였으나 별세(別世)할 때의 병명은 간경화증 및 만성기관지염 및 위수하증이었다.

이와 관련해 도산이 별세할 당시의 상황을 그를 간호하였던 평생 동지 이갑의 딸 이정희(李正熙)는 ‘아버님 秋汀 李甲’제하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날은 1938년 3월 10일이었다. 나는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외출 중이었는데 저녁 일곱 시쯤 전화가 왔다. 도산 선생께서 위독하시니 빨리 들어오라는 연락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첫 방공 연습이 실시되는 날이어서 길이 막혀버렸다. 수송동 집에서 대학 병원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이나 걸렸다.

병원에 도착한 것이 그날 밤 여덟 시였다. 위급 환자인 도산 선생은 이미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게 아닌가.

“저 왔어요. 정희에요!”

어느새 시력이 상실되어 알아보지는 못하나, 내 목소리만은 알아들으시는지 순간 선생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도산 선생의 마지막 눈물이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하루같이 분투해 오신 선각자의 마지막 눈물이었다.

각일각 팔은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으며, 혀는 이미 굳어져 한 마디의 유언도 남길 수 없었으나, 짐짓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 순간의 애통스런 정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밤이 깊어 갔다. 열두 시 자정을 알리는 시보의 울림이 마지막 ‘땡!’하고 칠 그때 도산 선생의 숨길은 ‘딸깍!’하고 멎었다. 거인의 최후였다. 아버님보다는 20년을 더 사시고 향년 61세로 이렇게 생애의 막을 내렸다.

도산 선생 임종의 자리에는 안치호, 장회근, 이선생, 김순원 그리고 우리 어머님과 큰아이 이창선과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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