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베를린 연방하원 앞에서 열린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 (출처: 뉴시스)
지난 4월 베를린 연방하원 앞에서 열린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 (출처: 뉴시스)

지난 4월 24일 독일 베를린의 연방하원 앞 광장을 손팻말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시점이었다.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 시위였다. 손팻말에는 조속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소망과 요구가 담겨있었다.

손팻말 간 거리는 수십㎝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활동가 일부가 청소년들이 직접 만든 손팻말을 모아 하원 앞에 전시해놓은 것이다.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시위방식이었다.

독일에서 베를린은 시위 천국이다.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과 도로, 알렉산더 광장 등은 서울의 시청 앞, 광화문 광장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이 지역은 주말이면 시위로 교통이 통제되기 일쑤다. 주로 소수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시위가 열린다. 성 소수자와 난민 인권 개선, 전쟁 반대 등의 구호를 쉽게 들을 수 있는 곳이다.

극우세력의 집회 장소가 되기도 한다. 보통 이 경우 극우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몇 배, 몇십 배로 몰려와 맞불 집회를 연다.

베를린의 시위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열리기도 하지만, 도심 축제와 같은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매년 알렉산더 광장 등에서 열리는 '세계 여성의 날' 시위는 축제 분위기를 물씬 풍겨왔다.

일반 시위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성 소수자 인권 향상을 위해 매년 8월 말 열리는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는 유럽의 대표적인 동성애 퍼레이드로 자리매김했다.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다. 동서독 분단 시절 고립된 서베를린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몰렸다. 통일 이후에도 도심 공동화 현상이 벌어진 동베를린 지역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이민자들도 베를린으로 몰렸다. 그만큼 다른 독일 도시들과 달리 다양성이 넘쳤다. 고국에서 탄압을 받은 소수민족 출신 난민들도 대도시인 베를린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를린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탓인지 코로나19도 베를린의 시위문화를 막지 못했다.

지난달 6일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에서 열린 반인종차별 시위. (출처: 뉴시스)
지난달 6일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에서 열린 반인종차별 시위. (출처: 뉴시스)

특히 최근 미국에서 촉발된 반(反)인종차별 시위는 베를린에서 거의 매주 열리고 있다.

지난 6일 시위에는 알렉산더 광장에 수천 명의 시위대가 몰렸다. 대부분 마스크를 착용한 상태였지만, 거리 유지는 되지 않았다.

시위를 통한 코로나19 재확산 우려가 제기되자 지난달 14일에는 '인간 띠' 시위로 형태가 바뀌었다. 서로 손이 아니라 리본 끈을 잡아 접촉을 피하고 일정한 거리를 지켰다.

지난 5월 24일에는 시청 앞에 작은 종이배들과 신발이 모여있었다.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 보트와 바다에 빠진 난민의 신발을 형상한 것이었다.

이 시위는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코로나19 확산 위험에 처한 그리스의 난민 캠프 상황을 알리면서 난민 수용을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일부 시위는 코로나19 감염을 유발할 수 있다며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통제조치에 반대하기 위해 열린 시위가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됐다. 주로 이런 시위는 극우세력이 중심이 돼 왔다.

통제조치 반대 시위는 경찰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데다 폭력적 성향을 보여 일부 시위대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지난달 중순 코로나19 통제조치를 비판하기 위해 열린 보트 시위는 참석자들이 거의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데다, 사실상 야외 클럽 분위기를 방불케 해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더구나 이 시위는 병원 인근에서 열렸다.

주최 측은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다음날 현장을 청소하는 사진과 함께 '미안하다'는 문구를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여론은 '뉴노멀'(New Normal)에 적응한 시위 방식에 대해 호의적이지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거리 유지를 하지 않은 예전 방식의 군중 집회에 대해선 싸늘한 분위기다.

지난달 6일 베를린 반인종차별시위에 참여한 교민 서다희 씨는 5일 "집회 포스터에선 조용한 시위를 강조해 기대했는데 꼭 그렇지 않아 다소 실망감이 있었다"면서 "그래도 이후 반인종차별 시위 등에서 방역수칙을 지키는 새로운 데모 방식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박수를 보냈다"고 말했다.

(베를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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