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도덕정치(道德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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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고대 중국의 정치제도는 종법(宗法)과 혈연이 토대인 전제군주정치였다. 누군가 집권하면 타자는 전제군주의 음험한 위세에 겁을 먹고 정치 자체를 쉽게 거론하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모가 군사적 권모에 비해서 공개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첫 번째 이유이다.

대륙국가인 중국은 서부의 높은 산, 동남의 광대한 바다, 북방의 끝없는 사막과 초원이 천연장벽을 이뤘다. 폐쇄적 지리환경이 외부와 단절된 지역사회 역사를 결정했다. 중국에서 초기국가의 형성과정은 산악지대인 그리스에서 형성된 작은 도시국가 형태가 아니었으며, 로마가 지중해 연안의 개방적 지리환경에서 상업을 활성화 시킨 것과도 달리 사회적 분업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그리스나 로마에 비해 비옥하고 광활한 농토를 지닌 중국은 농업을 본업으로 여겨 정착농업 위주의 사회조직을 발전시켰다. 상업은 경시됐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상층부가 형성됐으며, 하부에서는 가부장적 가정이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단위로 오랫동안 보호됐다. 가부장적 가정은 농업을 통해 각 가족의 사유재산이 충분히 축적되면서 해체되지 않았다. 가부장적 가족은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토지를 공유하는 서로 보완적인 결합으로 구성됐다. 중국 고대사회에서는 그리스의 독립적인 도시성곽과 로마의 공화정에서 나타나는 공개적 특징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춘추시대에 사회경제적 형태가 변하면서 종래의 사회적 계급이 해체됐고, 전국시대에는 중앙집권적 전제국가가 새로운 형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종법적 혈연관계는 해소되지 않았고, 새로 출현한 중앙집권 제도에서도 긴밀하게 결합됐다. 전제군주는 통치의 핵심으로 전쟁을 결정하고 법을 제정하는 권력의 주체이자 가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의 반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군주가 없으면 국가의 수뇌와 주재자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나라를 국가(國家)라고 부르는 데에는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전제주의적 관념이 포함돼 있다. 국(國)은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家)의 확대개념이다. 군주가 통치의 핵심이 되자 그의 권력은 무한해졌다. 통상적 상황에서는 군사, 입법, 사법, 문교의 대권을 독점했다. 군주의 절대적 권위가 수립되고 난 후에는 심지어 군주와 관련된 사람과 일을 논의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정치적 권술은 더욱 은밀해졌고, 일반인들은 정치권 내부의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군주가 천자로 국가를 경영한다는 대원칙은 누구도 비판하지 못했고, 누군가 비판을 해도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제적 통치의 음험한 권위가 두려워 병풍 뒤에서 안일함을 지켰다. 극히 소수는 모험을 펼치다가 그나마 지녔던 통치계급의 이익마저 잃었다. 통치제도의 모순은 공개적 비밀로 간직됐다. 어떤 사람은 횡액을 피하기 위해 우회적인 수법을 사용했고, 권세가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고대의 좋은 방법을 모았다. 감출 필요가 없었던 병가의 권모와 감추어야했던 정치적 권술이 절묘하게 결합돼 군주를 설득했다.

윤리도덕과 정치제도는 다른 영역이지만, 사회와 정치의 발전의 과정에서 양자는 분리되지 않았다. 특히 중국 고대정치에서는 시종일관 양자가 분리된 적은 없었다. 윤리와 도덕의 압력을 받은 사람들은 감히 정치적 권모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는커녕 비난해야 사회적 질책을 피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인치가 이루어지자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은 가중됐다. 개인의 위신을 지키는 실질적인 방법은 도덕이 아니었으며, 정치적 권모술수는 통치자를 위한 찬양으로 점철됐다. 통치자에 대한 최고의 찬양과 비난은 윤리와 도덕이었고, 실질적 정치는 거기에 예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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