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프라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역사이야기] 프라하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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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유럽여행에서 때로는 성당을 답사한다. 프라하 카렐 다리 입구 카렐 4세 동상 오른편에 있는 성당에 들어갔다. 성당을 둘러보면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왔다. 이윽고 성당 위의 황금 십자가를 들고 있는 조각상을 봤다. 조각상이 어디에서 많이 본 사람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했더니 성당 이름이 ‘아시시의 성(聖)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불현듯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당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프란치스코 성당이 생각났다. 아시시는 2016년 3월에, 두브로브니크는 2017년 6월에 여행했다.

청빈의 표상 성 프란치스코(1182~1226)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향락에 빠졌던 그는 스무살 때인 1202년에 이웃 도시 페루자와의 싸움에서 포로가 돼 1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말라리아를 앓았다.

이것이 계기가 돼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서 살 것을 결심했다. 1205년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성문 밖의 허물어진 산다미아노 성당에 들어갔다가 제단 위에 걸린 십자가상에서 “프란치스코야, 폐허가 된 내 집을 다시 세워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 가게의 옷감을 팔아서 마련한 돈을 사제에게 주었다.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아버지는 그를 주교 앞으로 끌고 갔다. 프란치스코는 주교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입던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이 됐다. 이어서 그는 아버지에게 옷을 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저는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진심으로 부를 수 있는 이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그는 가족과 재산을 포기했고, 이후 예수의 길을 걸었다.

1209년에 프란치스코는 수도회 설립 인준을 받으러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만났다.

교황은 수도회 회칙의 생활방식이 너무 이상적이며 엄격하다는 이유로 인준을 유보했으나, 프란치스코를 만난 날 밤 꿈에서 ‘쓰러져가는 산 조반니 대성전을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장면’을 보고 구두 인준했다. 이후 ‘작은 형제들의 모임(프란치스코회의 정식 명칭)’의 수도사들은 예수의 생활을 본받아 청빈하게 지내면서 빈자(貧者)와 병자(病者)를 돌봤다. 1212년에 프란치스코는 18세의 클라라(1194∼1253)에게 권유해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를 설립하게 했다.

이들 탁발 수도사들은 사역한 지 10년도 안 돼 그 수가 5천명이나 됐고 수도사들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중동까지 활동을 벌였다.

1224년 9월에 프란치스코 아시시 근처의 산상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묵상하던 중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를 닮은 다섯 군데의 흔적이 그의 양손, 발, 옆구리에 나타났다. 성흔(聖痕)을 받은 것이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눈이 거의 먼 상태에서 고통에 시달리다가, 1226년에 선종했다. 1228년에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시성(諡聖)했다. 묘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지하에 있는데 촬영은 금지이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도 프란치스코 성당이 있다. 필레 문을 지나 오노프리오스 분수 맞은 편에 있는데, 성당 벽에는 ‘기도하는 성 프란치스코’ 그림이 있다. ‘작은형제회’ 수도사들은 1234년부터 두브로브니크에 정착했다.

한편 2013년에 선출된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성자인 ‘아시시의 성(聖) 프란치스코’의 길을 좇겠다며 그 이름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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