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급 신라불상인 금동여래입상 (제공: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천지일보 2020.6.30
국보급 신라불상인 금동여래입상 (제공: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천지일보 2020.6.30

진흥왕대 이후 여러 문화수용
‘미륵하생’ 신앙의 결과물
이재준 고문 세미나서 주장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지난 3월 20일자 본지 문화면에 단독 보도했던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국보급 ‘신라금동여래입상’. 이 불상이 삼국시대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양식이 가미된 독특한 양식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들 나라에서 다양한 불교 문물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이다. 또 신라 불상 미소를 대표하는 얼굴인 화랑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했다.  

◆삼국 불상 중 가장 대형

30일 오후 충북문화재 연구원(원장 장준식 박사)이 주최한 학술회의에서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은 주제발표를 통해 5~7세기 유행했던 남북조시대 불상 자료들을 제시하고 뛰어난 삼국 시대 신라 유물이라고 고증했다.

특히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신라 금동여래입상이 지금까지 발견된 삼국시대 금동 불상 가운데 대형이며 신라 불교 도입 초기인 6~7세기 유행했던 미륵하생 신앙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불상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이 고문은 주제발표를 통해 현재 30㎝가 넘는 대형 불상은 모두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만큼 금동여래입상에 대한 문화재 지정의 시급함을 촉구했다.

이 고문은 “신라는 5세기 초 법흥왕 대 불교를 공인했으며 대를 이은 진흥왕은 대 중국과의 문화교류를 열망한 가운데 남조인 양, 북조인 북제와의 교류를 시작했다”고 전제하고 이 시기 유행했던 미륵하생 신앙을 진흥시켜 신라의 부국강병을 꾀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에 발표된 금동미륵여래 입상은 바로 미륵하생 신앙의 결과물로 머리와 얼굴 수인, 가사의 의문을 종합할 때 남북조 양식이 고루 접목됐다”고 말했다.

신라 금동여래입상의 대퇴부(우) 문양이 중국사천성 성도 박물관 소장 중인 남조 불상(좌)과 닮아 있다.  (제공: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천지일보 2020.6.30
신라 금동여래입상의 대퇴부(우) 문양이 중국사천성 성도 박물관 소장 중인 남조 불상(좌)과 닮아 있다. (제공: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천지일보 2020.6.30

이 고문은 이 불상의 머리는 소발이며 얼굴은 큰 편이나 두손이 작게 표현돼 북제 불상의 면모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의문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U자를 이루고 양 대퇴부에서 각각 동심원을 이룬 것은 남조인 사천성 만불사에서 출토된 석조여래상을 닮고 있다.

이 고문은 “이 같은 양식은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미륵불 양식의 전형이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불상의 뒷면 의문 양식은 3~4세기 동진(東晉) 시대에서 유행했던 불상의 의문과도 같아 매우 주목된다고 밝혔다.

◆“문화교류, 불상 제작 영향”

신라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랐으며 특별히 불교에 집착했고, 17세 때는 남조인 양나라에서 사신과 함께 신라 승 각덕을 통해 불사리를 보내자 직접 흥륜사 앞길까지 나가 이를 영접했다는 기록이 있다. 진흥왕은 스스로 전륜 성왕(轉輪聖王, 세계를 통일,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임을 자처하고 아들의 이름도 동륜, 사륜이라고 지었다.

이 고문은 “진흥왕이 군비를 확장해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강유역을 뺏은 것은 바로 북제(北齊)와의 교류를 위한 것이었으며, 북제 무성 황제가 진흥왕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봉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시기 북제로부터 많은 불교 유물이 전래됐을 것으로 상정하고 불상 제작에 영향을 줬다고 강조했다.

지난 2012년 북제 땅인 허베이성 업성(邺城) 유적에서 발견된 3천여 점의 불교 유물 가운데 하나인 ‘석조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 사유상’과 많이 닮아있고 이번에 공개한 신라 금동미륵여래상의 얼굴 모양과 의문도 북제 시기 유행했던 불상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이 고문은 “진흥왕은 문화가 발전했던 양나라에 대한 선망을 버리지 못하다 멸망 후 개국한 진(陳)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진에는 4차례나 사신을 보내 문화를 받아들이고 북제와도 교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금동불상의 하체 위문은 바로 만불사 불교 유적에서 나온 석제 불상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또 미륵하생 신앙은 진흥왕~진평왕 대 신라화랑의 태동에 영향을 줘 삼국 시대에는 경주 단석산 신선암 미륵불, 경주 남산골·정창골 미륵 삼존불, 진천 사곡리 마애여래석불 등 화랑유적으로 남아있으며, 신라 고려시대 가장 유행했던 마애미륵여래입상으로 이어졌다고 부연했다.

미국 하버드대 부속기관인 포그박물관에 소장 중인 건무 4년명 금동불좌상. 뒷면의 U자 문양이 신라 금동여래입상과 닮아 있다. (제공: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천지일보 2020.6.30ⓒ천지일보 2020.6.30
미국 하버드대 부속기관인 포그박물관에 소장 중인 건무 4년명 금동불좌상. 뒷면의 U자 문양이 신라 금동여래입상과 닮아 있다. (제공: 한국역사문화연구회 이재준 고문, 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천지일보 2020.6.30ⓒ천지일보 2020.6.30

◆미륵하생 신앙이란

‘미륵신앙’이란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 하나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해 제 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해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해 발생한 신앙이다.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따르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 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수도하다가 석가모니불이 입멸해 56억 7000만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차 늘어 8만세가 될 때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했다. 그래서 미륵불은 미래불이라고 한다.

삼국시대 신라사회에 미륵신앙이 넓게 퍼진 것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고통받던 민초들의 소망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흥륜사(興輪寺)의 주존불도 미륵이었다. 진평왕 때의 흥륜사 승려 진자는 항상 미륵상 앞에서 ‘대성(大聖)이 화랑으로 화신해 세상에 출현해 줄 것’을 발원했다.

그는 미륵선화를 만나기 위해 웅천(熊川, 지금의 김해 지방) 수원사를 찾아가 용모가 아름다운 미시랑을 만나 궁중으로 데리고 갔다. 미시랑이 바로 화랑의 시초다.  또한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 장군이 화랑 시절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 香徒)라고 불렀다. 용화란 미륵보살이 장차 성불할 용화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미륵하생 신앙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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