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 정상. (제공: 구미시)ⓒ천지일보 2020.6.30
금오산 정상. (제공: 구미시)ⓒ천지일보 2020.6.30

백두산에서 이어진 산줄기

이름에 얽힌 다양한 신화들

군사적 요충지였던 금오산성

금오산의 향수 ‘성안마을’

[천지일보 구미=원민음 기자] 금오산은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의 경계에 위치한 지역으로 지난 1970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자연보호운동의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보물 제490호인 마애여래입상과 대혜폭포, 도선굴 등 빼어난 자연경관과 외침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금오산성도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마음조차 더 답답해진다. 이럴 때 우리의 역사를 간직한 금오산을 보며 머리를 식히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여행을 해보자.

◆금오산의 역사와 다양한 이름들

한반도의 진산은 백두산이다. 백두산에서 태백산이 이뤄졌고 다시 소백산으로 내려와 죽령과 조령 그리고 추풍령을 지나 무주의 덕유산을 만들어냈다. 이어 한 지맥이 동북으로 거슬러 김천 대덕의 수도산이 되더니 세 갈래로 나뉘어 합천의 가야산,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삼도봉, 나머지 한줄기가 금오산이다.

금오산이라는 지명에는 여러 가지 신화가 전해온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가 저녁노을 안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한 데서 비롯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천지개벽 때 전부 바다가 된 세상에서 산봉우리가 까마귀머리만큼 남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으며 금만큼 남아서 금오산이라는 설도 있다.

예로부터 산은 보는 사람과 방향, 지방마다 다르게 불리기도 했는데 금오산도 예외가 아니다.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기려 수양산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선산지방에서는 상봉이 붓끝 같다 해서 필봉이라 했다. 또 인동 방면에서는 귀인이 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라 해 귀봉으로 불렸고 거인이 누워있는 산 모양이라 해서 거인산, 부처님이 누운 형상이라 해서 와불산으로도 불렸다. 김천에서는 노적봉이라는 별명도 붙었었다. 산이 위대하면 이름도 별명도 많다 하는데 금오산도 이와 같다.

금오산 내 금오산성. (제공: 구미시)ⓒ천지일보 2020.6.30
금오산 내 금오산성. (제공: 구미시)ⓒ천지일보 2020.6.30

◆외적 침입 막아낸 요새, 금오산성

금오산 등산길을 따라 돌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거대한 성문이 등산객을 반긴다. 바로 이성이 고려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고성지 금오산성이다.

금오산성의 둘레는 약 3500m로 현재 남문·서문·중문·암문(暗門) 및 건물터가 남아 있다. 금오산의 정상부를 두른 내성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만들어졌으며 천연의 암벽이 태반을 차지한다.

고려 말 선산·안동·개령·성주 등의 많은 백성들이 왜구를 피해 이곳에서 살았으며 군사를 징발해 산성을 수비했다.

금오산성이 국방상의 요충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1595년 성벽을 수축했고 승병대장 사명(四溟)도 이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전란 중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계속된 패전 뒤 전략의 본영으로 삼았다. 1596년 우의정 이원익이 성주 영중으로 내려가 금오산성을 수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으며 천생산성과 함께 낙동강을 끼고 있어 반드시 수호할 요지임을 강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1639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해 내성과 외성을 다시 쌓았고 1735년에는 선산도호부사가 군병 3500여명을 배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1868년을 마지막으로 수축해 당시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가 산정 부락터에 남아 있다.

금오산을 등반하던 박정한(40대, 남, 구미시 남통동)씨는 “금오산에 올라 금오산성을 보다보면 치열하게 싸웠던 옛 선조들의 모습이 남아있다”며 “등반도 하고 관광도 하며 역사적인 사실들까지 되짚어 볼 수 있는 공간이다”고 말했다.

금오산 내에 있는 성안마을. (제공: 구미시) ⓒ천지일보 2020.6.30
금오산 내에 있는 성안마을. (제공: 구미시) ⓒ천지일보 2020.6.30

◆금오산의 옛 향수를 간직한 ‘성안마을’

금오산 현월봉에서 서남쪽으로 600m 정도 가다 보면 평편한 분지가 있다. 1970년대까지 이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바로 ‘성안마을’이다. 해발 800m에 자리 잡은 성안마을은 물이 마르지 않는 마을로 알려져 있었다. 칼날 같은 암벽이 곳곳에 솟아 있었지만, 금오산에는 물이 많아 사람들은 밭농사와 약초 채취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성안마을 감자술과 배추는 유명한 명물이었다. 인근 고을의 식도락가들은 아직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다. 성내 분지 안에서 나는 감자와 배추는 고랭지에서 자라 바이러스의 피해도 없고 평균 기온이 10도 안팎이기 때문에 맛과 질이 좋기로 알려졌다.

1970년대 화전정리 사업으로 주민들은 다 산에서 내려왔지만 좋은 물과 좋은 채소로 만든 음식들은 아직도 70~80대의 고장 사람들에게 그 맛을 잊지 못하는 향수를 느끼게 하고 있다.

박건식 구미금오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 시설계장은 “금오산은 3개의 시·군이 만나는 기점에 있는 산으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다. 또 접근성이 좋아 올레길도 잘 돼있어 구미시민이 많이 찾는 명산”이라며 “현재 코로나19로 관광객이 줄고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지만 생활 속 거리두기 방침을 지키며 아름다운 경치와 건강, 마음의 행복까지 얻을 수 있는 금오산을 많이 찾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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