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갑자기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전면에 나서서 대남 비난전에 나섰을 때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방한 ‘담화문’은 가관이었다. 한마디로 논리도 품격도 없는 상식 밖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김여정이 지니고 있는 북한 내 권력의 무게나 그간의 남북관계에서 그가 보였던 괜찮은 이미지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김여정과 북한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정말 ‘판문점 선언’ 이전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일까. 북한도 국익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거기에 견줘 봐도 답은 쉬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한 근저에는 현 시점이 남북미가 다시 협상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는 그나마 적절한 시점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재선에 빨간 불이 켜진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트럼프에게 ‘대북 카드’만큼 매력적인 것도 많지가 않다. ‘종전’을 선언하며 냉전체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부터 역사적이다. 그 일을 트럼프가 해낸다는 것은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한 엄청난 성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근 김여정의 돌변한 태도가 더 궁금했던 것이다.

보라는 듯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면서 당장이라도 ‘9.19 남북군사합의’까지 폐기할 듯 대남 압박을 강화하던 북한이 또 갑자기 바뀌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23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를 열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전격 보류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최전방 지역에 재설치한 대남 확성기 방송시설도 대부분 철거했다. 반갑긴 하지만 급작스런 변화인지라 무엇보다 그 속내를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북한이 갑자기 대남 공세를 강화한 이유도, 그리고 또 갑자기 김정은 지시로 숨고르기에 나선 이유도 아직은 뚜렷하지 않다. 북한 안팎으로 몇 개의 전략적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는 추론 정도만 가능하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김정은 정권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보다 무게가 큰 ‘김여정 담화문’으로 한국 정부를 타깃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남조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인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식의 통치용 담화문 성격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김여정을 전면에 내세워서 ‘포스트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을 대내외에 과시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다. 김정은이 잠시 평양을 비웠을 때 그의 ‘사망설’까지 나오면서 김정은 이후의 권력관계가 관심을 끌기도 했다. 따라서 북한 입장에서는 김정은 이후에도 정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는 뜻이다. 아무튼 이번 기회를 통해 김여정이 사실상 이인자 역할을 맡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 가지 더 중요한 노림수도 따져봐야 한다. 한국 정부를 때리면서 미국을 움직이는 전략적 포석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중재자 역할을 맡은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을 고강도로 압박한다는 것은 곧 미국에게도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북미 정상회담에 나선 것은 문재인 대통령 때문인데, 그렇게 해서 지금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식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도 궁지로 몰리고 있으니 조만간 다시 판을 만들어 보자는 외교적 노림수가 내포돼 있다는 뜻이다.

마침 헬비(David Helvey) 미 국방부 인도태평양안보차관보 대행이 즉각 화답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헬비 차관보 대행은 지난 24일 한 포럼에서 북한의 최근 압박 강화와 대남 군사행동 계획의 전격 보류를 언급하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은 여전히 비핵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이는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시켰다. 직전 미국을 방문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방미 일정을 마친 뒤에 나온 미 당국자의 발언이어서 미국에서도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가능한 대목이다.

물론 아직은 그 어떤 예단도 성급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가 바뀔지, 북한 김정은 정권의 비핵화 진정성이 어떤 수준인지는 감을 잡기 어렵다. 다만 최근 볼튼(John Bolton) 전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펴낸 회고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움직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하려 하자 볼튼 자신이 제동을 걸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볼튼 이후의 다른 참모의 전향적 역할을 전제로 한다면, 미 대선 직전의 상황에서 다시 큰 판을 그려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가능성을 고려해서 이번에는 김여정이 빠지고 김정은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대남 공세를 보류시켰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남북관계 및 북핵 협상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 변화가 관건이라는 사실은 볼튼의 회고록을 통해서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비핵화 의지가 여전히 확실하다면 이후의 북핵 협상에서 더 큰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절호의 시점이기도 하다. 북한이 최근 모든 면에서 매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도 깊은 수렁에 빠져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도 북핵 협상의 승부수를 띄워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면 딱 지금이 새로운 ‘골든타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김여정의 강경책과 김정은의 온건책이 급격하게 교차하는 상황을 보면서 지금의 이 골든타임에 문재인 정부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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