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

인류의 역사는 생존·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과 평화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시민계급이 등장하는 근대에 오면서, 과거보다 더 많은 국가 단위의 전쟁이 끊임없이 발발함으로써 평화를 갈구하는 인류의 소망은 더욱 커졌다. 1907년에는 헤이그 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됐고, 1928년에는 전쟁포기에 관한 조약 등이 체결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20세기 전반에 발발했던 제1·2차 세계대전은 인류사에서 전쟁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었다.

국제평화에 대한 인류의 염원은 국제연합의 결성을 이끌었다. 국제연합은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인권의 국제화를 위한 노력도 함께 했다. 1968년 국제연합은 제1회 세계인권회의에서 테헤란 선언을 채택하고 국제사회의 긴장 증대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어서 평화를 인권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는 평화적 생존권을 인권으로 제시했다.

1978년 국제연합 총회는 ‘평화적 생존의 사회적 준비에 관한 선언’에서 모든 국가와 인간은 인종·신조·언어·성별을 불문하고 평화적 생존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고 규정했다. 이렇게 평화적 생존권(right to live in peace)이란 이름의 새로운 인권이 등장했다. 평화적 생존권의 법적 근거로는 국제연합헌장 제2조 제4항의 무력행사금지와 세계인권선언 제3조와 국제인권규약 제6조에 규정된 생명권이 주장되고 있다. 그렇지만 평화적 생존권이 국제법상 독자적 인권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확실하게 결정된 바는 없다. 다만, 지역적 조약인 아프리카인권헌장을 보면 제23조 제1항이 “모든 국민은 국내 및 국제의 평화와 안전으로의 권리를 갖는다”라고 해 평화적 생존권을 인권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후반에 많은 국가는 국제평화주의를 헌법에 수용했다.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은 침략전쟁의 부인과 함께 전쟁무기 불소지에 관한 내용을 헌법에 담았다. 우리나라 헌법도 국제평화주의를 수용해 헌법상 평화국가원리를 헌법의 기본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현행 헌법을 보면 전문에는 ‘평화적 통일의 사명’과 ‘항구적인 세계평화’ 등을 규정하고, 제4조에서는 ‘평화적 통일정책’, 제5조에는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 등의 표현을 통해 국제평화주의를, 제6조에서는 국제법질서의 존중을 규정해 평화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 한 국가가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평화국가원리는 헌법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평화적 생존이 모든 인권의 출발이라 보고 인간의 존엄성 또는 행복추구권으로부터 도출된다고 본다. 헌법재판소는 평화적 생존권에 대해 초기에 보호법익이 모호해 권리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가, 2006년도에는 “침략전쟁에 강제되지 않고 평화적 생존을 할 수 있도록 국가에 요청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해 권리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2009년 헌법재판소는 판례를 변경해 헌법상 열거되지 않는 권리가 되려면 권리내용을 요구할 힘과 재판규범성이 있어야 하는데 평화적 생존권은 권리내용이 불명확해 구체적 권리라고 보기 어렵다고 기본권성을 부인했다. 국가에 전쟁을 하지 않도록 요구하는 것은 침략전쟁의 부인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기본권으로 다뤄야 할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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