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순장

 

우남정

묵은 상자의 먼지를 털어내고, 꺼낸 시집을 펼친다.

백팔 페이지 책갈피에 꽃무덤이 드러났다.

한 줌의 가을과 함께

 

삼킨 향기 목에 걸린 채

종이와 꽃이 서로를 껴묻은 흔적이 있다.

함축과 은유, 생략을 지나 낯설게

밤을 건너온

새벽이 번져 있었다.

 

밀봉을 어찌 다스렸는가 꽃이여

흐르던 실핏줄에

시즙마저 향기로워, 다투어 활자들이 몸을 적셨을까

저 갈피에 잦아든 울음

책이 날아간 자리에 한 마디 절명사를 남겨둔다.

 

[시평]

우리의 젊은 시절, 예쁜 꽃이나 단풍이 든 나뭇잎들을 주워 책갈피에 꽂아 넣고는 했다. 책갈피 안에서 꽃은 종이의 무게에 눌린 채, 꽃이 지니고 있던 물기를 서서히 말려간다. 그래서 무슨 아름다운 무늬와 같이 꽃은 책 속에서 정지된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실은 그 시간을 우리는 잘 모른다. 책갈피에 넣고는 대부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날 우연히 책을 펼치다, 책갈피에서 어느 때엔가 꽂아놓은 꽃을 발견하게 된다. 꽃의 향기와 꽃의 진액을 모두 날려버린, 그래서 이제는 그 자태만 남은 꽃을 문득 만나게 된다.

이런 것을 일본사람들은 ‘압화(押花)’라고 이름한다. 책갈피에 눌린 꽃이라는 의미이다. 시인은 이 모습을 ‘꽃의 순장’이라고 문장으로 풀어 말하고 있다. 책의 활자들과 함께 책 속에 묻어버렸으니, 그래서 이제 꽃의 시신(屍身) 같은 모양만 남겼으니, 순장(殉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 순장은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다.

꽃은 책갈피 사이에서 눌린 채 서서히 말라가면서 활자들에게 향기로운 시즙(屍汁)으로 적셔주기도 하고, 종이와 서로 껴묻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주기 때문이다. 고즈넉이 앙상한 몸매만 남겨둔 채, 우리가 모르는 사이 꽃은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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