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기병과 보병의 싸움

임진년 4월 28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충주 땅에 들어오면서 마을을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정오경에 그들은 탄금대로 내달아 삼면을 완전히 포위했다.

전투에 앞서서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선조에게 보낼 장계를 작성토록 했다. 왜적을 눈앞에 두고 보고서를 쓴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조선군과 왜군은 달천 벌판에서 전투를 벌였다. 신립의 군대는 8천명, 고니시는 1만 5천명이었는데, 두 지휘관의 전술은 달랐다. 여진족을 정벌한 조선 최고의 명장인 신립은 기병이 주특기였고 고니시는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 주력이었다.

# 왜군의 전술에 당한 신립

먼저 신립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지휘하는 조선군 기병 1천명이 돌격했다. 왜군은 조선군의 활에 맞고, 말에 짓밟혀 죽었다. 고니시의 중앙군이 밀린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신립은 2차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2천명의 기마대가 돌격해 나갔다. 왜군은 둘로 갈라져 단월역 쪽으로 잠시 후퇴하다가 곧이어 달천강을 따라 아래에서 쳐들어온 좌군(左軍)과 산을 돌아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넌 우군(右軍)이 합류했다.

소 요시토시의 좌군 조총부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3열 연속으로 총을 쏘며 전진했고, 우군도 가세했다. 게다가 조선군의 말이 습지에 빠져 허덕이자 조총의 표적이 환히 드러났고, 말과 병사가 한꺼번에 거꾸러졌다. 왜적의 총소리는 땅을 뒤흔들었고, 조선군의 쌓인 송장이 산과 같았다.

신립은 어쩔 줄 모르다가 혼자서 말을 타고 두 번이나 적진으로 쳐들어갔으나 전진할 수 없었다. 신립이 도로 강가로 달려오는데 마침 김여물이 여울 앞에 있었다. 신립은 김여울을 부르면서 “그대는 살기를 원하는가?” 하였다. 그러자 김여물이 웃으며 “내가 어찌 목숨을 아낄 사람이요?” 하고 도로 탄금대 밑으로 달려가 신립과 더불어 왜적 수십명을 죽였다. 이때 왜적들이 바짝 추격해오니 두 사람은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신립은 46세, 김여물은 44세였다. (신경, ‘재조번방지’)

한편 이일은 동쪽 골짜기를 따라 산으로 도망갔다가 왜적 두세 명을 만나 한 명을 죽여 수급(首級)을 가지고 서울 도성에 가서 치계(馳啓)하였다.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은 망연자실이었다.

탄금대 전투는 기병대 보병, 말과 조총의 대결이었는데 왜군의 일방적 승리였다. 왜군 종군 승려 덴케이는 ‘서정(西征)일기’에 “왜군은 3천개의 수급을 취했고 수백명을 사로잡았다”고 기록했다.

한편 조선군 대군이 온 것을 믿고 피난하지 않은 충주의 백성들과 관속(官屬)들은 다른 고을보다 심하게 죽음을 당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이로써 조선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4월 30일에 선조는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난 갔다.

# 신립의 패인(敗因)은 오만과 무지

신립의 패인은 오만과 무지이다. 부하의 의견들을 아예 무시했고, 조총으로 무장한 훈련된 왜군을 하찮게 보았다.

나중에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신립은 날쌔고 예리하기로 당대에 이름이 나 있었지만, 계책과 계략에는 서툴렀다. 옛사람이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만 훗날을 위해 경계(警戒)로 삼아야 할 일이기에 여기에 덧붙여 써 둘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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