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무등산 보리밥 기본 상차림에 신선한 열무가 어우러져 풍성한 상차림이 돋보인다. ⓒ천지일보 2020.6.23
무등산 보리밥 기본 상차림에 신선한 열무가 어우러져 풍성한 상차림이 돋보인다. (제공: 광주시) ⓒ천지일보 2020.6.23

세대를 초월해 누구나 좋아해

고소한 참기름 냄새 식욕 돋워

신선한 채소와 나물의 어울림

전후세대 눈물의 밥이 별미로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배고플 때 더 그리워지는 추억의 맛 ‘무등산 보리밥’의 풍성한 상차림은 광주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과 ‘풍류’의 멋을 대변한다.

‘무등산 보리밥’에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태양초 고추장에 각종 나물을 골고루 넣은 다음 쓱쓱 비벼서 신선한 열무나 상추 등에 한입 싸서 먹으면 ‘식도락’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

본지는 지난 18일 현재 광주 대표 먹거리로 선정, 세대를 초월해 누구나 좋아하는 무등산 보리밥을 맛보기 위해 ‘무등산 관광호텔 인근 보리밥 거리’를 찾았다.

코로나19에도 여전히 성업 중인 보리밥집 분위기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가득해 식욕을 돋웠다. 점심시간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도 사람 사는 것 같아 볼거리다.

콩나물, 가지나물, 상추무침, 고사리나물, 무생채, 호박나물, 버섯볶음 톳나물 등 계절에 따라 바뀌는 각종 나물에 된장국 등의 맛깔스러운 음식, 말 그대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져 나오는 것이 ‘광주 무등산 보리밥’의 특징이다.

커다란 쟁반에 가득히 담아 온 반찬에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순간 “앗, 이걸 어떻게 다 먹지”라는 놀란 표정을 보신 아주머니가 “드시다 보면 다 먹어집니다”라고 함박웃음을 보냈다. 주변 테이블을 살펴보니 아주머니의 말이 사실이었다. 집 밥처럼 자극 없는 나물이 많아 대부분 남김없이 다 먹는다는 것이 또 하나의 무등산 보리밥의 ‘매력’이다.

옆 테이블에 친구와 함께 무등산 보리밥에 무등산 막걸리를 마시던 김진석(72, 동구)씨는 “옛 선조들이 쌀이 부족한 시대, 보리를 삶아 밥을 해서 먹었지. 어쩌면 보리밥은 암울했던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보리밥은 우리 어머니 또 그 어머니 세대의 눈물의 밥”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각종 나물에 비벼낸 ‘무등산 비빔밥’은 그야말로 풍성한 맛이 다 함께 어우러지는 밥상의 하모니”라며 무등산 보리밥을 예찬했다.

옛말에 밥이 보약이라고 할 만큼 우리 조상들은 “밥 먹었느냐”고 항상 끼니를 챙겼다. 인사도 그렇게 했다. 그만큼 먹는 일은 ‘생’을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르신들은 지금도 “밥은 잘 먹고 다니느냐”며 자녀들과 손자 손녀의 건강을 걱정한다.

목포에서 주말여행을 왔다는 김정미(40)씨는 “무등산 보리밥은 야채에 쌈을 싸서 먹으니 식감도 좋고 소화가 잘돼서 위에 부담이 없어 가장 좋다”며 “무등산 공기를 마시며 먹는 맛이 일품”이라고 말했다.

주말 가족들과 함께 점심 나들이를 나온 한 어르신(60, 북구 매곡동)은 손자와 함께 보리밥집 마당에 주렁주렁 열린 살구를 먹으며 자녀들을 향해 “잘 먹었다”며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무등산 보리밥거리’는 오래전부터 해오던 식당이 대부분이어서 어딜 들어가도 제철에 나오는 각종 나물에 ‘열무 쌈’이 넉넉하게 제공된다.

◆무등산 보리밥의 역사

광주시에 따르면 지난 1960년 말 한국전쟁으로 한동안 폐쇄된 무등산의 등산로가 정비되면서 광주시민들은 하나둘 무등산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 즈음이 되자 차츰 경기가 회복되고 더 많은 사람이 무등산을 왕래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니 그만큼 무등산 입구에도 식당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이유인지 장사가 되질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어느 식당 주인은 직접 무등산에 올라가 이유를 알아냈다.

점심시간이 되자 ‘장불재’에 모여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슬쩍 메뉴를 살펴보니 등산객의 도시락메뉴는 다름 아닌 보리밥이었다. 주인이 “이만하면 살만해졌는데, 왜 아직도 보리밥을 먹느냐”는 질문에 등산객들은 “산에 올라오면 허기가 지니 옛날에 배고팠던 시절에 먹었던 보리밥이 자꾸 생각이 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 식당 주인은 무등산 보리밥의 메뉴를 탄생시켰고 보릿고개의 향수를 그리워하던 등산객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전문 ‘보리 비빔밥’집도 늘게 됐다.

배고픈 시절을 보냈던 세대들에게 보리밥은 아련한 추억이자 향수를 부르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보리밥은 식사 한 끼를 너끈히 해결할 수 있고, 비교적 저렴한 음식 값으로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광주시민들에게 무등산 보리밥이 더 큰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무등산 보리밥의 맛이 바로 광주의 정신과 닮아있기 때문은 아닐까. ‘보리 비빔밥’은 각종 나물과 채소가 한데 어우러져 가장 맛있는 맛을 낸다. 이는 광주의 색채와도 닮아있다.

하나의 색이 아닌 여러 사람의 색깔과 개성이 더해져 더 큰 하나를 이루고 더 큰 힘을 이루는 광주. 각색의 나물과 보리, 채소가 어우러져 보리 비빔밥이라는 하나의 맛, 최고의 어울림을 연출한다. 맛에 차이는 있으나 차등은 없는 ‘무등의 정신’ ‘무등의 세상’ 무등산 보리밥 한 그릇에 담긴 무등의 얼이자 맛이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태양초 고추장에 각종 나물을 올려 놓은 비비기 전 무등산보리밥.  ⓒ천지일보 2020.6.23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태양초 고추장에 각종 나물을 올려 놓은 비비기 전 무등산보리밥. ⓒ천지일보 2020.6.23

◆무등산보리밥에 얽힌 사연

민간 설화에 따르면 광주 무등산 인근 마을에는 옛날 정이 많기로 소문난 모자가 살고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장씨와 그런 어머니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효를 다했던 아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아들은 서울로 학교에 가게 됐고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레 어머니 집에 들른 아들은 어두운 방에서 홀로 저녁을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어머니의 밥상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고추장을 비벼낸 보리밥에 짠지 냉수 한 그릇이 전부였던 것이다.

“어머니 왜 이렇게 밥을 드십니까?”라는 아들의 말에 “늙은 어미 밥상이 다 그렇지, 나는 고추장에 보리밥 비벼 먹는 게 질로 좋아야”라는 어머니의 말. 이후 아들은 어머니께 전화해 저녁에 찾아뵐 테니 맛있는 반찬을 좀 해 달란 부탁을 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각종 반찬으로 한 상을 푸짐하게 차려냈다. 그런데 아들 앞에는 흰 쌀밥이, 어머니의 밥상엔 식은 보리밥이 올라왔다. 아들은 꾀를 냈다. 흰 쌀밥이 너무 질린다며 자신도 똑같이 식은 보리밥을 먹겠다고 한 것이다.

어머니는 역시 보리밥에 고추장만을 비벼 드시는 것이 아닌가. 아들은 어머니와 똑같이 밥을 비볐다. 어머니는 아들의 그릇에 이것저것 반찬을 올려줬다. 아들 역시 어머니 그릇에 똑같이 반찬을 올렸다.

그렇게 쓱쓱 비벼 먹은 고추장 ‘보리 비빔밥’은 아들이 맛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추억의 맛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시 찾은 고향. 어머니와 함께 먹던 보리 비빔밥의 추억이 간절했던 아들은 무등산 기슭의 백반을 메뉴로 하는 집에 들러 식당 주인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상차림에 보리밥과 고추장을 넣어달라고 한 것이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종종 먹던 메뉴라 설명을 덧붙이자 식당 주인은 흔쾌히 밥상을 차려줬다. 맛을 보던 아들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아들은 매년 이 집을 찾아와 똑같은 메뉴를 먹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식당 주인은 아예 보리 비빔밥을 메뉴로 내걸었다. 식당에 온 손님 중 몇몇이 보리 비빔밥을 시키기 시작했고 그 맛은 어느새 입소문이 나 그 식당을 대표하는 메뉴가 됐다.

이후 무등산 기슭에는 보리 비빔밥을 하는 집이 하나둘 늘게 됐고 무등산 보리밥이라는 거리까지 형성됐다는 그립고도 맛있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점점 날씨가 더워지는 여름날, 문득 ‘밥 한 끼’ 같이 먹으며 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생각날 때, 무등산 보리밥 한 그릇으로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의 피로를 날려 보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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