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중앙집권이 확립되자, 제후를 봉하는 대신 공신이라는 명예와 관직을 주는 제도가 확립됐다. 논공행상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대두됐다. 우리 역사에도 논공행상의 실패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웠던 사례가 있다. 이괄(李适)의 난이 그 사례이다. 이괄은 본관이 고성(固城)으로 무과에 급제해 선조 때 형조좌랑을 역임하고 광해군 12년에는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됐다. 신경유(申景裕)의 협박에 가까운 권유로 인조반정에 참여한 그는 임진왜란 때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岉)의 아들 김류(金瑬)와 처음부터 지휘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나중에 인조로 등극한 능양군을 추대하기로 계획한 반란군의 주모자는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김류, 최명길(崔鳴吉), 이괄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기호학파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였다.

군사를 동원하기로 한 사람은 이귀, 김류, 이괄이었으나 이귀는 평산부사로 나가 있었으며, 이괄은 함경도 병마사로 제수돼 임지로 떠나야 했다. 김류는 강계부사로 있다가 탄핵을 받아 쫓겨난 상태였다. 이귀와 김류는 처음부터 반란을 공모했으며, 이괄은 김류와 가까웠던 신경진의 설득으로 거사에 참여했다. 반란을 일으키기 1년 전, 평산부사로 나가있던 이귀는 범사냥을 핑계로 군사들의 무장을 건의했으나 의심을 받고 허락을 받지 못했다. 정변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초조해진 반란군은 홍제원에 모여 군사행동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거사계획이 탄로나 체포명령이 떨어졌다. 이귀는 거사시간을 앞당겨 출병을 서둘렀지만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병력을 제대로 집결시키지 못했다. 이귀는 다급해 이괄에게 대장을 맡겼다. 김류가 뒤늦게 참가하자 이괄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이귀의 중재로 다시 김류가 대장이 돼 궁궐로 쳐들어 간 반란군은 광해군을 제거하고 인조반정에 성공했다.

반란에 성공한 서인은 사분오열돼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괄은 논공행상에서 2등공신으로 밀렸다. 반란계획에 늦게 참여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공로에 비해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반정 직후에 한성판윤으로 임명된 그는 곧 북방의 정세가 위급하다는 이유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돼 외직으로 떠났다. 그가 떠난 후에 서인들은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 그리고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이시언 등이 변란을 꾸민다고 고발했다. 이들은 광해군과 가까웠으나 서인을 견제하려던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인은 이들에게 위협을 느꼈다. 조사결과 그들의 역모가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이괄과 감정이 좋지 않았던 김류와 김자점은 이괄을 해임하고 중앙으로 소환하자고 건의했다. 인조는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이전과 한명련을 체포해 국문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았다. 나머지 고발된 사람들은 모두 하옥됐다. 이괄은 아들을 체포하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이고 압송되던 한명련을 구해 반란에 참여시켰다. 1만의 병력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한 이괄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했다. 황주에서 친구인 정충신과 남이홍이 이끄는 진압군을 격파한 그는 임진강을 돌파하고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나 도원수 장만, 정충신, 남이홍 등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추격하자 도성을 버리고 강원도로 도주했다.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이괄의 부하들은 그와 한명련의 목을 잘라 관군에 투항했다. 그것으로 반란은 평정됐지만, 내전으로 북방을 지키던 조선군의 주력부대가 대부분 궤멸되고 말았다. 나중에 후금의 침입을 받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논공행상의 실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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