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임진왜란을 징비한다<9>
[역사이야기] 임진왜란을 징비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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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천혜의 요새, 조령을 포기한 신립

고니시의 왜군 1만 8천명은 4월 25일에 상주에서 이일의 군대를 괴멸시키고 26일에 문경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고 현감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기슭으로 피해 갔는데 적이 쫓아가서 항복하라고 했다. 신길원이 분연히 꾸짖고 굴하지 않으니 적이 그의 사지를 잘라 죽였다.

고니시는 처음에 조령(문경 새재) 입구에 이르러 험준한 산세(山勢)를 보고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여러 차례 정찰했는데 군사가 한 명도 없이 조용하므로 과감히 군대를 진출시켰다.

신립은 조령을 안 지킨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나중에 명나라 도독 이여송이 조령을 지나다가 탄식하기를 “이런 형세가 있는데도 조령을 지킬 줄을 몰랐으니 신총병(申摠兵 신립)은 지모가 없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

# 순찰 군관을 목 베다니

4월 27일 밤에 순찰을 나간 군관 한 사람이 적병이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했다. 이러자 신립이 홀연히 성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러자 군중(軍中)이 소란스러웠는데 신립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 신립은 몰래 객사(客舍)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신립은 순찰 군관이 망언해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며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조리돌렸다.

순찰 군관의 목을 벤 신립. 총대장으로서 정탐을 전혀 모르니 너무 어리석다.

이윽고 신립은 적병이 아직 상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는 왜적이 10리 가까이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신경은 조령을 안 지킨 신립에 대하여 이런 시를 남겼다.

 

구름 위의 험한 산길, 날카로운 칼문 같은데

낭떠러지에 매달린 나무, 가지 잡기도 두렵네.

장군이 험한 곳 버려 좋은 계책 못 썼으니

헛되어 사람들 전사 시켜 귀신 되게 하였네.

(신경, ‘재조번방지’)

 

# 신립,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다.

4월 28일에 신립은 달천(㺚川)을 뒤에 두고 탄금대(彈琴臺 가야 출신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 그곳은 좌우로 논이 많고 물풀이 뒤섞여 있었고 며칠 전에 비가 내려서 말이 달리기에 불편했다.

이를 본 광흥주부(廣興主簿) 이운룡이 “이것은 죽을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말렸다. 그러나 신립은 “망령된 말로 일을 그르친다”며 곤장 30대를 쳤다. 이운룡은 흐르는 피를 씻은 뒤 전투대열에 합류했다.

종사관 김여물도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아들 김류에게 편지를 썼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한 사람도 이르는 사람이 없다. 남아(男兒)가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할 뿐이다.”

그는 또 집안에도 편지를 썼다.

“나는 여기서 죽을 터이니 가족들은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계시는 곳)로 달려가고 다른 곳으로는 피난하지 말도록 하라.”

김여물은 편지를 종에게 주어 집안에 전하게 했는데 이미 왜적이 사방에 이르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28일에 고니시의 왜군은 단월역에 도착했다. 고니시는 달천 벌판에 조선군이 배수진을 쳤다는 첩보를 접하고 군사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고니시가 7천명으로 중앙군을 맡고, 소 요시토시가 5천명으로 좌군, 시게노부는 3천명으로 우군을 맡았다. 후방은 하리노부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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