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스포츠 칼럼니스트·스포츠학 박사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빼어난 상상력이다. 3개월여만에 미국 텍사스주 콜로니얼 컨트리클럽에서 재개되는 미국프로골프 투어 찰스 슈와브 챌린지 대회에서 참가 선수들이 대회 첫날 오전 11일 오전 8시 46분(현지시간, 한국시간 11일 밤 10시 46분)에 모든 샷을 멈추고 백인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세상을 떠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위한 1분간 묵념으로 추모하기로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묵념시간을 오전 8시 46분으로 결정한 이유는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을 눌린 8분 46초의 시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플로이드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위조지폐 사용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는데, 출동한 경찰관은 무장하지 않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결박해 사망하게 했다.

그리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가 세운 학교의 모토는 “All is number(모든 것이 수이다)”였다고 한다. 인간 세상의 모든 본질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원자, 분자 등으로 구성된 물질세계는 결국 숫자로 구분된 물질이 형성됐다는 말이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지성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기로 ‘읽기(Reading), 쓰기(Writing), 셈하기(Arithmetic)’ 등 이른바 ‘3R’을 꼽았다. 특히 셈하기는 인간이 실제 생활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스포츠가 탄생하며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철저한 계량화와 기록추구라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스포츠 사회학자 앨런 거트만은 대표적인 명저 ‘근대 스포츠의 본질’에서 근대 스포츠의 특징 7가지를 설명하면서 숫자로 구성된 스포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 스포츠는 숫자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올림픽과 월드컵은 사실상 숫자로 짜여진 대표적인 세계스포츠 대회이다. 각각 대회 이름부터 ‘몇 회’라는 숫자가 들어가고, 열리는 많은 종목과 경기 결과는 모두 숫자로 순위를 집계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개회식 날짜와 시간도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8’이라는 숫자를 상징화해 2008년 8월 8일 오후 8시8분에 맞췄다.

축구, 야구, 농구, 배구, 골프 등 대표적인 인기 종목에는 ‘상수’화된 숫자가 여러 개 있다. 축구는 전후반 45분씩 갖는 게 전 세계적인 공통 룰이며, 야구는 1번부터 9번까지 타자가 일순하도록 배정한다. 농구는 프로농구의 경우 1쿼터부터 4쿼터까지 이어지며 마이클 조던의 ‘23번’은 워낙 유명해 시카고 불스는 그 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보존하고 있다. 골프에는 18홀, 72타라는 기본 숫자가 있다. 골프 홀컵 지름이 108㎜라는 사실도 재미있다. 불교에서 고뇌의 철학을 의미하는 ‘108 번뇌’와 의미상으로 연관성 여부는 확인된 바 없지만 골퍼들은 퍼팅을 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포츠의 숫자는 묘한 마력이 있다. 숫자를 보면서 대중들은 ‘희로애락’의 공감을 같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숫자라는 것은 정해진 상수이기도 하지만 언제든 움직일 수 있는 변수이기도 하다. 스포츠에서 큰 이변과 혁신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도 숫자를 통해서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축구대표팀이 월드컵 사상 4강에 오르며 전 국민이 붉은 악마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를 했던 것도 숫자라는 마력에 푹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번 미 PGA 골프에서 억울하게 죽은 흑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기가막힌 숫자 조합을 이끌어낸 것은 스포츠들이 갖고 있는 착상에서 나온 것이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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