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장평에서 진(秦)에게 대패한 조(趙)는 한단까지 포위되는 고통을 극복하고 연(燕)의 공격마저 격파했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시기에 조의 통치계급 내부에서 모순이 격화됐다. 조의 기둥이던 염파(廉頗)는 연의 5개의 성을 탈취하고 강화를 체결했다. 그러나 염파를 신임하던 효성왕의 후계자 도양왕(悼襄王)은 노장이 거북했다. 염파를 해임하고 악승(樂勝)을 파견했다. 염파는 왕명을 거부하고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도주했다. 실망한 염파는 위(魏)로 망명했다. 위왕은 염파의 동기가 의심스러워 선뜻 중용하지 못했다. 진의 공격을 받고 염파가 필요해진 조왕이 다시 불렀다. 염파도 자신이 훈련시킨 조군을 지휘하고 싶었다. 조왕은 염파의 지휘능력이 궁금해 사신을 파견했다. 염파를 시기한 곽개(郭開)가 염파를 폄하하는 보고를 해달라고 사신을 회유했다. 사신을 만난 염파는 건재를 과시하기 위해 한 말의 밥과 고기 10근을 먹었으며, 무장을 갖추고 말에 올라 무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귀국한 사신은 이렇게 보고했다.

“노장의 식사는 여전했지만, 신을 만나는 동안 세 번이나 오줌을 누고 왔습니다.”

조왕은 염파를 포기했다. 초에서 몰래 그를 초청했다. 초의 장수로 임명됐지만 염파는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조군에 비해 초군이 약하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옛 부하들이 그리웠다. 이 명장은 결국 초의 수춘(壽春)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로소 조는 그의 위대함을 알았다. 방난(龐暖)이 염파의 후임으로 조군을 지휘했다. 진과 연은 조군을 경시했다. 연왕은 지난 패배를 설욕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염파는 떠났지만 조군은 만만치 않았다. 응전에 나선 방난은 연군을 대파했다. 방난은 승세를 타고 초, 한, 위, 연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을 공격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귀국하던 길에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제를 공격해 화풀이했다. 이 전쟁은 강진에 대항하는 마지막 합종연합군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 명장도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조군의 사기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조에는 다른 명장 이목(李牧)이 있었다. 그는 안문(雁門)을 지키면서 흉노군 10만명을 격파하고 영토를 북방으로 확장했다. 강골이었던 그는 전장에 파견된 장군은 필요하다면 군주의 명령을 어길 때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무엇보다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을 중시했다. 대신 군사들에게 엄격한 기사(騎射) 훈련을 요구했다. 정보를 중시한 그는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간첩을 활용하고 상황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요처에 봉화대를 설치했다. 이목은 평소에 부하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흉노가 우리의 관대로 들어와 노략질을 하면 즉시 가축들을 성안으로 모으고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전공을 노려 흉노를 사로잡거나 싸우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참한다.”

군사들은 이목의 명에 철저히 복종했지만, 흉노는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이목을 시기하던 중앙의 정적들도 그를 비난했다. 조왕도 몇 차례 수비에 치중하는 그를 꾸짖었지만, 이목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평소의 전략을 유지했다. 화가 난 조왕은 다른 장군으로 교체했다. 이후 조군은 흉노와 싸웠지만, 그때마다 크고 작은 손실을 입었다. 변경의 백성들은 다시 이목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목은 병을 핑계로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이 탄 조왕이 억지로 부르자 이목은 소신을 지키도록 허락하신다면 명을 받들겠다고 대답했다. 부임한 이목은 다시 과거의 전략을 고수했다. 흉노는 이목들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군사들도 싸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이목은 복병을 설치하고 일부러 들판에 가축을 방목했다. 흉노가 그것을 노리고 공격하자 이목은 전군을 투입하여 대파하고 10만의 적을 죽였다. 이후 10년 동안 조의 서북방에 외침이 사라졌다. 이목은 훗날 강력한 기병대를 이끌고 의안전투에서 진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는 6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진군의 마지막 패배였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