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신립의 오만

4월 20일에 삼도순변사 신립은 한양 도성을 떠날 때 선조를 접견했다. 선조는 보검을 내리면서 전교했다.

“이일 이하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

이윽고 선조가 “왜적이 어떠냐?”고 물으니 신립은 왜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에 선조는 “변협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는데, 경(卿)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라고 말했다.

신립이 나간 뒤에 선조는 “변협은 진실로 훌륭한 장수이다. 내가 항상 그를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내가 어찌 왜적을 걱정할까?”라고 했다. 이때 변협(1528~1590)이 죽은 지 2년이었다(이항복 ‘백사집’).

1555년(명종 10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왜선 60척이 전라도 장흥·강진을 노략질하고 해남 달량포까지 침입했다. 이러자 해남 현감 변협이 왜구를 물리쳤다. 1587년에 그는 전라우방어사가 돼 녹도·가리포의 왜구도 격퇴시켰다.

신립은 1583년 온성부사 시절에 함경도 종성에 쳐들어온 여진족 족장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친 맹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왜적과 싸운 적이 없었음에도 왜인을 왜노(倭奴)라고 가볍게 여겼다.

4월 1일(임진왜란 12일 전)에 신립을 만난 류성룡이 조총을 지닌 왜적을 경계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고는 하나 그 조총이라는 게 쏠 때마다 사람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나는 새도 잡는다’는 조총(鳥銃)을 우습게 본 것이다.

# 불길한 징조들

선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온 신립은 빈청(賓廳)에 들러 대신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섬돌을 내려오는데 머리 위의 사모가 갑자기 땅에 떨어졌다. 이를 본 사람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한편 신립은 용인에 이르러 “적세가 심히 성해서 실로 막아낼 일이 어려우니 오늘의 일은 민망하고 딱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장계를 보냈다. 그런데 장계에 서명(署名)을 빠뜨렸다. 사람들은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류성룡, ‘징비록’).

# 신립의 독선

4월 26일에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8천명의 군사를 얻었다.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과 함께 조령(鳥嶺) 시찰에 나섰다. 신립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김여물: 아군의 수가 열세이고 적이 기세가 날래어 맞싸우기가 어려우니 조령을 지키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종장: 벌판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이 불리할 듯합니다. 이곳의 험한 산세에 의지해 많은 깃발을 꽂고 연기를 피워 적을 산란하게 만들어 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신립은 생각이 달랐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벌판에서 기병으로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또 우리 군사는 훈련이 안 되었으니 배수진을 쳐야 한다.”

충주 단월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신립은 상주 전투에서 패한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이일에게 왜적에 대해 묻자 이일이 말했다.

“이번의 왜적은 1570년 경오년과 1555년 을묘왜변과 견줄 게 아닙니다. 또 북쪽 오랑캐처럼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한양을 지키십시오.”

이러자 신립이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패장이니 목 베어야 마땅하나 이번에 공을 세워 속죄하라.”

신립, 독선적이다. 종사관 김여물·충주목사 이종장과 패장 이일의 의견을 아예 무시했다. 이런 옹고집은 곧 재앙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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