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세계 10대 경제 강국임을 뽐내는 한국이지만 왜 한국 서민들의 삶은 이리도 팍팍한가. 수출로 떼돈을 벌지만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 아닌가. 그 많은 돈은 어디로 다 갔는가. 누가 다 가져 갔는가. 서민의 삶이 어느 나라는 어떠냐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힘없는 서민의 삶이 고단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그런 말은 조금의 위안거리도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서민들보다 근면하고 알뜰한 우리 서민들을 모욕하는 말이다. 우리 서민들이 게으르고 모자라서 못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잠시 공정사회 구현의 외침이 요란했었다.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소리였다. 하지만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이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서민의 일자리가 늘었는가. 서민이 공정한 대접을 받는가. 서민의 자식들이 공정한 규칙에 의해 취업을 하고 있는가. 대기업 슈퍼마켓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던 동네 구멍가게가 숨을 좀 돌렸는가. 사설학원 안 다니고도 상급학교 진학이 가능한가. 부자나 권력자들의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는 고쳐졌는가. 사회적 약자에게 각종 기회가 공정하게 돌아가고 있는가. 돈과 권력의 카르텔은 깨졌는가. 주택난 전세난 물가난은 나아졌는가. 법의 문턱은 낮아졌는가. 그게 그거 아닌가. 공정사회의 구호는 어디로 갔는가. 땅도 적시기 전에 공정사회의 단비는 그쳤다.

서민의 울화가 심하게 터지는 때가 있다. 해마다 한 번씩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가 이루어지는 때다. 공개된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상태를 보고 서민은 참담함을 느낀다. 서민은 빚으로 사는데 그들은 매년 재산이 크게 는다. 그들이 과연 우리와 똑같은 사회 구성원인가. 과연 일반 국민과 다를 것 없는 성실한 생활인인가.

이런 의아심을 갖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들도 공직자이기 전에 가족 부양하고, 자식 키우고, 가르치고, 비싼 사설학원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고, 이런저런 많은 일에 생활비 쓰고 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매해 재산이 늘어나는가. 서민의 삶의 방식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런가. 그들의 세계는 서민의 세계와 다른가.

스스로 설명하는 재산 증식의 이유는 주로 부동산투자나 주식투자와 같은 재테크다. 그리고 많은 재산을 가진 이유는 원래 재산가의 집이거나 처가가 부자다. 그러고 이러한 이유는 흠 잡을 데 없이 갖춘 증빙 서류로 정당화된다. 그러면 끝이다. 서민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지만 누가 시비를 할 수 있나. 그냥 통과다. 하긴 구린 재산이 있더라도 그걸 신고 목록에 적어 넣을 바보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직자의 재산 공개는 그저 통과의례이며 연례행사에 불과하다. 이런 신고는 받아 무엇 하나. 무슨 실익이 있는가. 괜히 국민 앞에 공직자의 재산 자랑하는 것인가. 그렇게 해서 못 사는 서민들 배앓이나 하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이게 정부가 할 일인가. 이런 재산 공개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않은가.

이렇게 형식적인 재산 공개의 부작용은 크다. ‘왜 그들의 재산은 늘어야 하며 왜 힘없는 서민의 재산은 줄어야 하는가. 빚으로 살아야 하는가. 국민이 세금을 냄으로써 받는 그들의 연봉으로서야 그들이나 서민이 사는 방식이 똑같다고 볼 때 어떻게 그 많은 저축이 가능한가. 이런 국민의 소리가 안 들리는가. 이 정서의 벽이 위화감이다. 뭔가 사회의 불공정성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전체 규모 수백조의 가계부채에 짓눌린 서민의 삶에다가 무엇 때문에 이런 울화통 터지는 불을 지르는가.

서기 1780년 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은 중원 대륙을 여행한다. 청 건륭 황제의 70세 생일인 만수절 축하 사절로 가게 된 삼종 형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서였다. 그 해 5월에 길을 떠나 10월에 돌아와야 하는 길고 긴 여행이었다. 연경에 있어야 할 황제가 열하로 피서를 떠나 있었기 때문에 열하까지 갔다 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 장정이 대략 3천여 리였다.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너 끝없이 펼쳐진 요동벌을 보고 갑자기 ‘훌륭한 울음 터(好哭 場)’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다’라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초야에 묻힌 일개 선비였다. 요동벌을 훌륭한 울음 터라고 한 까닭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옮김). ‘사람들은 다만 칠정(七情)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우레와 같은 것일세’라고 말했다. 훗날 1809년 추사 김정희가 이에 대한 시 한수를 남겼다나.

우리 서민들에게 그 같은 호곡 장이라도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 같다. 탁 트인 요동벌 같이 마음 놓고 울어도 될 만한 훌륭한 울음 터가 될 만한 곳이 어디란 말인가. 기뻐 울고 즐거움이 사무쳐 우는 울음이라면야 굳이 박지원이 말한 훌륭한 울음 터까지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한번 터지면 우레와 같이 터질 고통의 울음, 슬픔의 울음을 감당하기엔 그런 장소가 적합할 것 같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물을 닦아 준다는 말은 언제나 사기다. 선거 때 쏟아내는 달콤한 말과 공약은 당선되고 나서는 아니면 말고 식이 되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한 정권이 오고 또 한 정권이 가는 것을 우리는 한두 번 겪는가. 그런데 이를 어쩌나. 국민의 가슴 속에는 한번 터지면 주체하지 못 할 눈물과 한(恨), 분노가 쌓이고 있는 것을 -. 고위 공직자들이 국민 앞에 스스럼없이 내민 재산목록만 해도 국민들을 슬프게 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이런 재산 공개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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