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1592년 4월 24일 밤에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은 상주 남쪽 20리 되는 장천(長川) 냇가에 진을 쳤다. 그런데 순변사 이일은 척후(斥候)를 아예 안 세워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북방의 여진족을 무찌른 명장치고는 병법이 너무 졸렬하다.

“척후는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말은 옛날에도 못 들었다.” (조경남 ‘난중잡록’)

25일에 이일은 상주에서 모은 농민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군사 8, 9백명으로 북천(北川) 냇가에서 진법을 훈련했다.

산세를 따라 진을 치고 진 한 가운데에 대장기(大將旗)를 세웠다. 큰 깃발 아래에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이일이 자리했으며, 종사관 박호와 윤섬, 판관 권길과 찰방 김종무 등은 말에서 내린 채로 이일의 뒤에 죽 늘어섰다.

얼마 뒤에 여러 명이 두셋씩 짝을 지어 숲속을 나와 배회하며 이일의 진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왜군의 척후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밤에 개령 사람이 참수된 지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얼마 있다가 고을의 성안 몇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야 이일은 군관 박정호 등을 시켜 정탐하게 했다.

그런데 왜군이 숲 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즉시 총을 쏘아 죽이고는 군관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갔다. 박정호는 본래 용사(勇士)로 유명하여 군인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꺾일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그의 머리가 사라진 것을 본 우리 군사들은 기가 꺾일 대로 꺾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의 대부대가 집결해 조총을 일제히 쏘아대며 좌우에서 에워싸니 군인들이 즉사했다. 이일이 급히 군사를 재촉해 활을 쏘게 했지만, 아군이 쏜 화살은 겨우 수십 보쯤 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패색(敗色)이 짙어지자 이일의 종사관 박호와 윤섬, 방어사의 종사관 병조좌랑 이경류, 판관 권길이 모두 죽었고 군사들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박호는 경상감사 김수의 사위로 나이 22세였다.

이일은 곧바로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왜군이 추격해 오자 말을 버리고 갑옷도 벗어 던졌다. 그러나 왜군이 계속 쫓아오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가까스로 문경에 이른 그는 급히 패전 상황을 선조께 알리고 죄를 기다리다가 신립이 충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조령을 넘어 충주로 달려갔다. (류성룡, ‘징비록’)

# 상주 전투의 패인

상주 전투의 패인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이일은 왜적을 너무 몰랐다. 왜군의 병력, 기량이나 동태를 너무 몰랐다.

반면에 왜군은 조선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벌판에서 훈련받고 있는 조선군을 기습했다. 전투는 하나 마나였다. 조선군은 9백명인데 왜군은 1만명으로 11배나 많았고, 조선군은 전투 한 번 안 해 본 농민인데, 왜군은 100년 가까운 전국(戰國)시대를 거치며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조선군)와 프로(왜군)의 싸움이었다. 게다가 포르투갈에서 온 왜군의 신무기 조총(鳥銃)은 조선의 활을 압도했다.

오죽했으면 ‘무데뽀(無鐵砲 아무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실렸을까?

그런데 이런 일은 3일 뒤인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도 똑같이 반복됐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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