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북위 말년 선비족의 추장 이주영(爾朱榮)은 막강한 병력을 장악했다. 중앙 정부는 그를 두려워했다. 호태후는 아들 효명제 원후(元詡)와 사이가 나빴다. 대대로 선비족의 추장을 역임한 이주씨는 북위에서도 고관이 됐다.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산서성 태원을 본거지로 삼아 병주자사 원천목(元天穆)과 결탁해 호태후를 견제했다. 528년 봄, 효명제가 태후 일당을 제거하려고 몰래 이주영을 낙양으로 불렀다. 이주영은 고환(高歡)을 선봉으로 삼아 진격하던 도중 중지명령을 받았다. 이주영이 멈칫하는 사이에 호태후가 원후를 죽이고 3살인 원쇠(元釗)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계속 남하해 원자유(元子攸)를 효장제(孝庄帝)로 옹립하고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낙양에 입성한 이주영은 애원하는 호태후를 살해하고, 참모 비목(費穆)의 건의에 따라 조정의 고관과 원씨 종족 2천명을 살해했다.

이주영은 당장 제위를 노릴 형편이 되지 못했다. 망하고 있었지만 북위는 만만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자신을 목표로 세를 결집하고, 남조에서 북방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면 상황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원자유에게 사죄했다. 원자유는 이주영을 진정시키면서 조금씩 자신의 세력을 강화했다. 역시 강인한 선비족의 후예였던 원자유는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주영의 의심을 풀기 위해 그의 딸을 황후로 맞이했다. 낙양이 불안했던 이주영은 일시적으로 본거지 진양으로 돌아갔다. 종친이던 원호(元顥)는 남조 양(梁)에 투항했다가 양무제의 지원을 받고 낙양을 공격했다가 이주영에게 패했다. 자신감을 얻은 이주영은 낙양으로 돌아왔다. 원자유의 음모에 대한 이주영의 대비책도 치밀했다. 딸을 황후로 삼은 것도 궁중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쌍방의 치열한 수 싸움이 전개됐다. 530년 가을, 낙양이 불안했던 이주영은 천도를 단행하려고 했다. 본거지를 잃게 된 원자유는 서둘렀다. 몇 차례 암살시도가 실패했다. 이주영도 원자유의 음모를 알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원자유는 유악하고 무능했다. 팽팽한 대치상황에서 교만은 패배의 지름길이다. 이주영은 점차 느슨해지고 있었다. 며칠 후 원휘(元徽)가 태자가 태어났다는 구실로 이주영을 입조시키고 살해하자고 건의했다. 이주영의 딸은 임신한지 9개월 째였다. 이주영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원자유가 반대했지만, 원휘는 무사들을 숨기고 태자의 탄생을 이주영에게 알렸다.

평소의 이주영이라면 신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그의 판단력은 흐려졌다. 이주영은 급히 입조했다. 원자유는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중서사인 온자승(溫子升)이 조서를 들고 대전으로 나갔다. 이주영은 온자승이 조서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하며 대전으로 들어갔다. 웃으며 술을 마시는 원자유에게 다가가는 순간 이주영은 동문에서 칼을 든 무사들이 뛰어드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황제를 인질로 잡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원자유를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원자유는 무릎에 두었던 칼을 뽑아 휘둘렀다. 잇달아 무사들이 달려들어 이주영을 난도질했다. 이주영이 죽은 후 원자유는 그의 손에 있던 장부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원자유의 심복들을 모두 축출하고 이주영의 심복들만 남겨둔다는 계획이 적혀있었다. 그는 분노하며 탄식했다.

“하루만 늦었더라도 이주영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니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구나!”

이주영의 사촌동생 이주세륭(爾朱世隆)은 북으로 도주했다. 분주(汾州)자사로 있던 이주영의 조카 이주조(爾朱兆)도 재빨리 진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태무제 척발도(拓跋燾)의 현손인 원엽(元曄)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주영을 죽였지만 원자유의 운명도 비참했다. 이주조는 곧바로 낙양을 습격해 원자유를 사로잡아 진양으로 끌고 갔다가 죽였다. 얼마 후에 선비족이 세운 강력한 나라 북위는 동서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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