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순변사 이일, 도망가다.

1592년 4월 25일에 왜적이 상주에 침입하자 순변사 이일(1538∼1601)이 패하여 도주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1만 8700명은 4월 15일에 동래성을 함락시킨 후 18일엔 밀양을 점령했다. 이후 청도·대구를 거쳐 상주에 이르러 이일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먼저 4월 17일의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변경의 보고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일로 순변사를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싸움에 패하여 종사관 박호·윤섬 등은 다 전사하고 이일은 단기(單騎)로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내용이 간략하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과 류성룡의 <징비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조경남의 <난중잡록> 등은 상주 전투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자. 왜적이 상주에 침입했는데 이일의 군대가 패주하였다. 처음에 경상 감사 김수가 적변(賊變)을 듣고는 곧바로 제승방략(制勝方略: 작전 지역에 군사들이 모이면 중앙에서 온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군사작전을 편다)에 의거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 각자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모이라고 하였다.

이에 조령 밑의 문경 이하 수령들이 백성들을 이끌고 대구로 가서 노숙하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순변사를 사흘이나 기다렸다. 하지만 순변사 이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적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벌판에 모인 농민들이 동요하였다. 게다가 큰비가 내리고 군량도 떨어지니 이들은 밤중에 흩어져 버렸다. 이를 본 수령들도 말을 타고 줄행랑을 쳤다.

대구 사수가 무산(霧散)된 것은 순변사 이일이 군사 300명도 못 뽑아 서울에서 3일을 허비하고 20일에야 출발한 탓이었다.

21일에 이일은 조령을 넘어 문경에 들어왔는데 고을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급히 장계를 올렸다.

“오늘의 적은 신병(神兵)과 같아 감히 당할 사람이 없으니 신은 죽음을 각오할 따름입니다.”

이어서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군사 60명에게 먹이고 23일에 상주에 이르렀다. 그런데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역참에 나갔다가 그 길로 산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판관 권길만 혼자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군사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보고 권길을 책망하고 뜰에서 목을 베려 했다. 이러자 권길은 군사를 불러 모으겠다고 애원하고는 밤새도록 촌락을 돌아다니며 농민 수백 명을 끌어모아 24일 아침에야 돌아왔다.

이윽고 이일은 창고의 곡식을 내어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모았다. 곡식을 받으려고 산골에서부터 하나둘씩 백성들이 모여드니 수백 명이 되었다. 이리저리 모인 군사는 모두 8, 9백 명이었는데 이들은 오합지졸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6천 명의 군사를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과장일 것이다.

#척후(斥候)도 안 세우다니

이때 고니시 왜군은 이미 선산(구미시 선산읍)에 이르렀다. 저물녘에 개령(김천시 개령면) 사람이 와서 왜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다. 이일은 그가 유언비어로 군사들을 현혹시킨다고 노하면서 그를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리게 하였다. 적을 정탐(偵探)하는 일은 병법(兵法)의 기본 중 기본인데 척후(斥候)도 안 세운 이일. 게다가 왜적의 낌새를 알린 백성마저 참(斬)했으니 정말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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