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동백섬에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동백섬에는, 동백나무가 지천이었고 동백꽃이 앞다퉈 피고 있었다. 계절이 심술을 부렸지만 섬에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남도가 늘 봄과 함께 제 소식을 알리는 까닭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동백섬은 섬이었으나 오랜 세월 퇴적 작용으로 육지와 이어졌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백사장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서면, 오른쪽으로 동백섬이 보인다. 옛날에는 해운대라는 곳이 한갓진 곳이어서 여름철 해수욕 철에나 사람들로 붐볐고, 동백섬을 찾는 이들도 바닷바람 쐬러 부러 멀리서 찾아 온 외지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고층 아파트들이 해운대를 둘러쌌고, 해운대에서 살아야 부산에서 제법 먹고 산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산으로 둘러싸인 해운대의 정겨운 풍경은 사라졌고 동백섬은 현지 주민들의 동네 산책 코스가 되었다. 송정으로 넘어가는 달맞이 고개는 아름다운 그 이름과는 달리 아름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아파트들이 점령하고 있다.

예전의 동백섬은 꼭대기의 최치원 동상을 향해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내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요즘에는 섬 주위를 따라 목재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 바다 풍경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덕분에 관광객들이 많아졌고 사람들은 저마다 바다 구경 원 없이 하고 간다며 좋아한다.

세계정상회담을 열었다는 누리마루가 바라다 보이는 전망대에 서면, 옛날부터 가끔 바다 건너 일본의 쓰시마 섬이 보인다는 안내문이 나온다. 거기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따져 쓰시마는 그곳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며 어쩌다 사람들 눈에 보인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신기루 현상이라는 것이다.

실체는 없고 다만 헛것에 지나지 않는 신기루. 그것이 비록 신기루일망정 사람들은 쓰시마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곳에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남의 나라 땅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부산에 가면,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크게 히트하자 일본의 올드 세대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좋아했다는 소리가 있었다. 오래전 이야기이고 풍문으로 들은 것이어서 진위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영 턱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 노랫말이, 식민지 한국을 버리고 할 수 없이 제 나라로 돌아가 버린 그들의 서글픈 향수를 자극했다는 것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 곳에서, 영화 <해운대>의 해운대가 아니라, 오륙도와 해운대를 오가는 유람선을 따라 갈매기들이 떼 지어 나르고, 우주의 별들이 모조리 달려와 곤두박질치는 듯 반짝이는 바다, 그리고 한가로이 그것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모습이 얼마나 다행스러우며 또한 감사해야 할 일인지, 그런 것들을 생각한 것인데, 그것은 그들 나라에 닥친 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겨낼 것이며 또 일어설 것이다. 그런 후에, 그들은 또 독도가 저들의 땅이라 우길 것이고 그러면 우리들은 또 열이 콱 받을 것이다.

나는 다만, 동백섬에서 보이는 쓰시마가 신기루일 뿐이라는 말처럼, 인간에 대한 동정심과 배려, 따뜻한 손길과 온정 같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은 신기루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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