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연 통섭예술인

정진석 추기경은 책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에서 통섭(統攝)의 지혜를 강조했다. “우리 삶에는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다. 행복을 통해선 하느님의 은총을, 불행을 통해선 하느님의 경고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종교는 영생을 지향하는 공동체다. 불교에선 극락세계, 그게 영원한 세계다. 그리스도교의 천당, 그게 영원한 생명이다. 종교는 진리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향하는 공동체다. 그런데 이런 종교 간에 갈등이 있다는 건 모순이다.”

이리 가나 저리 가나 하나의 큰 줄기에서 만난다는 얘기다. 인문,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뜻에서 시작한 통섭의 개념은 요사이 지식인 사이의 화두다.

최민자 교수는 “사람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현상들이 매우 많다. 자연 현상이건, 인간 사회 현상이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지식과 삶의 통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없는 곳이 없이 실재하는 생명 그 자체인 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재화, 물화시킨 데 있다”고 주장한다.

어제 어느 커뮤니티 모임에서 트리즈 얘기가 나왔다. 몇 시간짜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데 어려워서 이해가 잘 안되었다는 얘기다. 과학에서 나온 원리이지만 경영학, 인문학에도 적용할 수 있음을 강사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강의를 한 탓이다. 공학 또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공학과 과학의 시각으로만 트리즈를 이해하고 설명하려고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통하면 저기에서도 통하는 법이다. 그래서 원리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다음은 블로그 ‘피타고라스의 창’에서 나오는 글이다.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설명하기 위해 화엄경에 인드라망이라는 것을 묘사해 놓으셨다. 인드라(Indra)는 본래 인도의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로 한역해 제석천(帝釋天)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제석천의 궁전에는 장엄한 무수한 투명한 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인드라망)이 있다.

그물코마다의 투명구슬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휘황찬란하게 투영된다. 삼라만상이 투영된 구슬들은 서로서로 다른 구슬들에 투영된다. 이 구슬은 저 구슬에 투영되고 저 구슬은 이 구슬에 투영된다. 작은 구슬은 큰 구슬에 투영되고 큰 구슬은 작은 구슬에 투영된다. 동쪽 구슬은 서쪽 구슬에 투영되고 서쪽 구슬은 동쪽 구슬에 투영된다. 남쪽 구슬은 북쪽 구슬에 투영되고 북쪽 구슬은 남쪽 구슬에 투영된다.

위의 구슬은 아래 구슬에 투영되고 아래 구슬은 위의 구슬에 투영된다. 정신의 구슬은 물질의 구슬에 투영되고 물질의 구슬은 정신의 구슬에 투영된다. 인간의 구슬은 자연의 구슬에 투영되고 자연의 구슬은 인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시간의 구슬은 공간의 구슬에 투영되고 공간의 구슬은 시간의 구슬에 투영된다. 동시에 겹겹으로 서로서로 투영되고 서로서로 투영을 받아들인다. 총체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투영이 이루어진다.

불교의 연기법, 연기적 세계관은 이 세상 모든 법이 하나하나 별개의 구슬같이 아름다운 소질을 갖고 있으면서 그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결코 그 하나가 다른 것들과 떨어져 전혀 다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 모두와 저 구슬들처럼 서로서로 그 빛을 주고 받으며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을 볼 때 주체와 객체를 대립적인 관계가 아닌 하나의 연속체, 시스템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위 서양의 분석적 사고와 동양의 종합적 사고가 융합할 때 진정한 통섭은 가능하다. ‘피카소와 장자가 만나다’라는 말처럼 동서양, 고금이 만날 때 통섭이 이루어지리라. 이러려면 사람들 마음이 열려있어야 하고 영, 심, 신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학력위조와 함께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스캔들로 몇 년 전에 미술시장에 찬물을 끼얹은 바 있는 신정아씨가 자전적 에세이 ‘4001’ 출간기념회에서 정운찬 씨(당시 서울대 총장)에 대해 “그는 겉으로만 고상할 뿐 도덕관념은 제로였다”고 했다.

“내 사건이 터진 후 정운찬 당시 총장은 스스로 인터뷰에 나와서, 나를 만나본 일은 있지만 서울대 교수직과 미술관장직은 제의한 적은 결코 없다고 해명을 한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고 언급했다.

그의 청렴한 학자 이미지는 어디 가고 책으로 인해 갑자기 인터넷의 가십(gossip)거리로 전락했는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 여성을 가운데 두고 일어난 얼빠진 사건인 소위 한국 영사들의 ‘상하이 스캔들’이 연상되는 것은 우연일까? “아, 그토록 품위있던 분이 저 지경에 이르다니! 왕실의, 군인의, 학자의 눈과 혀와 칼을 지녔거늘. 아름다운 이 나라의 희망이자 꽃이여. 행실의 거울이고 예절의 귀감이었던 분이, 뭇 사람이 우러르던 분이, 저렇게까지, 저렇게까지 무너지다니!”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필리아가 번민에 빠진 햄릿을 보고 한탄하는 말이다. 정운찬 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행복은 자신이 갖는 거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건 결국 자신의 몫이다.”

통섭의 세계에서는 불행과 행복이 통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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