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막대한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 (제공 간송미술문화재단)
일제강점기 막대한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 (제공 간송미술문화재단)

 

일제강점기에도 지킨 문화재… 82년 만에 소장품 경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곳곳에서 안타까운 소리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재 털어 지킨 우리네 문화유산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간송미술관이 재정 압박에 보물 불상 2점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오는 27일 경매에 나오는 보물은 간송가(家) 소장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이다.

간송미술문화재단에 따르면 2013년 재단 설립 이후 대중적인 전시와 문화 사업들을 병행하면서 많은 비용이 발생해 재정 압박이 커졌고, 이에 불교 관련 유물을 매각하고 서화와 도자, 전적이라는 중심축에 집중할 계획이다. 더불어 재단은 소장품을 매각할 수밖에 없게 돼 송구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간송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박물관이자 3대 사립미술관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막대한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1938년 ‘보화각’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선생의 나이 33세 때의 일이다. 그러던 것이 1966년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수장품을 정리·연구하기 위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체제로 재편돼 현재까지 이어졌다.

 

이번에 경매로 나온 금동여래입상(보물 284호. 37.6cm)(좌)과 금동보살입상(보물 285호. 22.9cm)(우). (제공 케이옥션) ⓒ천지일보 2020.5.22
이번에 경매로 나온 금동여래입상(보물 284호. 37.6cm)(좌)과 금동보살입상(보물 285호. 22.9cm)(우). (제공 케이옥션) ⓒ천지일보 2020.5.22

간송미술관은 1971년 가을부터 매년 두 차례 정기전시를 통한 소장품 공개와 우리 문화재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활동 등을 지속해 오면서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후 공익적인 성격을 강화하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 대중적인 전시와 문화 사업들을 병행하면서 재정적인 압박이 커졌다. 이런 가운데 전성우 전 이사장의 타계와 함께 추가로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면서 소장품 매각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앞으로 간송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많은 고민 끝에 간송의 미래를 위해 내린 결정을 너그러이 혜량해 주시기 바란다”며 “이를 계기로 더욱 단단해질 것과 향후 2~3년에 걸쳐 관계기관과 협력해 다목적 신축수장고 건립 등 시설을 대폭 개선하고 한층 더 활발하게 운영하기 위한 준비를 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대구시와 함께 대구간송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제2의 도약도 준비하겠다며 응원과 격려를 부탁하기도 했다.

 

신윤복 단오풍경(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뉴시스)
신윤복 단오풍경(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뉴시스)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

우리 민족의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 전영기의 장남으로 1906년 태어났다. 대대로 서울의 핵심 상권을 장악한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를 보냈지만 일찍이 친형과 작은 아버지, 조부와 부모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홀로 남은 그는 가문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아 24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 땅을 대표하는 거부(巨富)가 된다. 이미 1910년 경술국치를 경험하며 망국의 비극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간송은 그 많은 재산을 문화재를 지키는 데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문화보국(文化保國)’ 즉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정신으로 무분별하게 반출되는 문화재를 지키고 보호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의 옆에는 위창 오세창이 있었다. 천도교 대표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던 위창은 서예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에 조예가 깊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었다. 그런 위창의 옆에서 간송은 자연스레 위창의 문화보국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호인 ‘간송’도 위창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출처 뉴시스)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출처 뉴시스)

간송이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후일담은 여럿 전해지는데 그중에서도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일본인 수장가 마에다 사이이치로로부터 당시 기와집 20채 가격인 2만원에 구입한 일화가 많이 회자된다.

‘훈민정음’을 먼저 발견하고 수집한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이 극에 달해 우리 말, 우리 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압받던 시기 간송은 한글 창제의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아 한글을 지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당시 돈으로 큰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1천원을 요구했지만 간송은 이 귀한 것을 그 값에 사들일 수 없다며 1만원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소장품들은 국보급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소장품 목록들을 대략 살펴보면 훈민정음 해례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한자 표준음을 정립한 동국정운(세종 30년, 1448년, 국보 71호), 겸재 정선(1676~1759)의 금강내산(보물 1949호), 혜원 신윤복(1758~?)의 미인도(보물 1973호) 등이 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수 백 만원(현재 가치로 거의 1조원)의 재산을 우리네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 기꺼이 내어놓은 간송 전형필 선생의 그 희생과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문화재 보존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는 문화가 전파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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