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진한시대에서 청대까지 중국의 대규모 농민기의와 평민폭동은 의협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주도했다. 통치계급에서 이탈한 지도자들은 협의정신, 기량, 자유 등을 내세워 살인으로 살인을 막고, 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했다. 그들의 신념과 행위는 묵가의 평등사상과 거의 일치했다. 송강(宋江)의 양산(梁山)기의는 ‘체천행도(替天行道)’, 송종상(宋鍾相)의 양마(楊麽)기의는 ‘등귀천(等貴賤), 균빈부(均貧富)’, 원말의 홍건군은 ‘불평등이 사라지면 태평세상이 온다,’ 명말 이자성(李自成)은 ‘균전면량(均田免糧), 평매평매(平買平賣)’를 구호로 내걸었다. 청말 태평천국은 ‘전답을 같이 경작하고, 먹을 것을 함께 먹으며, 옷은 번갈아 입고, 돈을 함께 사용한다. 균등하지 않은 곳은 없고, 누구도 굶주리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다’라는 구호를 표방했다. 의협의 개체행위는 물론 역대의 대규모 평민기의, 폭동에는 모두 묵가적 요소를 포함했다. 진한시대 이래 의협에 관한 사적은 많지 않고, 대규모 농민기의와 농민전쟁도 항상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생산노동자는 오랫동안 존재했다. 이러한 사회적 기반에 묵가의 관념과 행위에서 조직형태까지 잠재돼 하층민이 중심인 비밀결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졌다.

근대 중국은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받고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 재기를 꿈꾸던 사람들은 중국의 오래된 문화가 서학에 억눌리는 상황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하며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감이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시대정신과 비장한 의식을 품은 이들은 대부분 전통적 사대부 출신이었지만, 기꺼이 유협을 자처하며 묵협의 유풍을 닮으려고 했다. 담사동(譚嗣同)은 ‘칼을 뽑아 소리쳐 노래하고 싶었던 것은 협골(俠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협을 좋아하고 검술에 능했던 담사동의 감성은 당시 지사들의 공통적인 심리상태였다. 담사동은 이미 사라진 묵학을 유교, 불교, 기독교와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그는 묵자의 인격적 역량을 받아들이기 전부터 묵자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임협정신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싶었다.

“만약 그 기회를 얻을 수 없다면 임협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백성들의 의기를 드높여 용감한 기풍을 제창하는 것도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일 것이다.”

완고한 보수파의 반대로 무술변법이 실패하자, 그는 정치적 망명을 하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죽을 줄 알면서도 돌아오면서 맹서했다.

“각 나라의 변법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중국에서는 변법으로 인해 피를 흘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것이 나라가 번창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다. 피를 흘린다면 나 담사동이 시작이다.”

양계초(梁啓超)는 스스로 호를 ‘임공(任公)’이라 짓고, 묵자의 임협지의에서 따왔다고 했다. 일찍이 묵학에 미친 그는 ‘묵학광’을 자칭했다. 그에게 묵가는 생사를 가볍게 여기고, 고통을 감내하는 의협정신의 모델로 망해가는 중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희망이었다.

“오늘의 중국을 구하려면 묵학이 어떻게 고통을 견뎠는지를 알아야 하고, 묵학이 어떻게 생사를 가볍게 여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 지금 조국을 구하려면 오로지 묵학뿐이다.”

그는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스승 강유위(康有爲)의 탁고개제(托古改制)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묵학구국’이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다소 지나친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의 묵학은 전통문화와 전통유학의 폐단을 반대하는 대안처럼 여기기도 했다. 적어도 유가문화를 제외한 민족문화의 근원 가운데 신문화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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