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선조는 안보 불감증

왜적이 부산을 침탈한 지 5일째 되는 4월 17일 이른 아침에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다. 왜적이 쳐들어 왔다는 첫 보고였다. 긴급 상황을 알리는 봉수(烽燧 횃불과 연기)는 아예 작동 안 했다.

그런데 박홍의 보고는 엉성했다.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에 가득 차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줄 알았습니다.”

대신들은 비변사 당상들과 함께 빈청(賓廳 대신들과 비변사 당상이 정무를 의논하는 곳. 창덕궁 희정당 앞 매점이 빈청이었다.)에 모여 선조를 직접 뵙기를 청했다. 그런데 선조는 무슨 영문인지 대신들과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대신들은 문서로 보고를 했다. 이러자 선조는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부지역에, 성응길을 좌방어사로 동부지역에, 조경을 우방어사로 서부지역으로 내려보내고, 유극량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竹嶺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 사이)을, 변기를 조방장으로 조령(鳥嶺 ‘문경 새재’로 더 친숙함,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 사이)을 지키게 하고, 겁 많은 경주부윤 윤인함을 친상(親喪) 중에 있는 전 강계 부사 변응성을 복귀시켜 교체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한편 선조는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즉시 잡아 오라 하였다. 1591년 3월에 선조가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접견할 때,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아뢴 정사(正使) 황윤길과 달리, 부사(副使) 김성일은 ‘왜적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아뢰어 그 죄를 묻고자 함이었다.

# 군사 300명도 선발 못 한 나라

18일엔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도착했고, 여러 고을이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연달았다. 이러자 한양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그런데 이일은 3백명의 정예병도 못 구해 3일이 지나도록 한양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정은 이일 혼자서 먼저 떠나도록 하고, 별장 유옥이 군사를 모집하여 뒤따라가도록 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7일)

당초에 이일은 병조의 ‘군사 선발 장부’를 입수하여 살펴보니 시정잡배와 서리(胥吏)·유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임시 점검했더니 유생들은 관복을 갖추고 시권(詩卷 과거시험 답안지 종이)을 들고 있고,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 관청 서리가 쓰는 두건)을 쓰고 와서 징병을 면제해 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참, 한심한 일이었다. (류성룡, 『징비록』)

# 삼도순변사 신립, 남쪽으로 향하다.

18일에 선조는 병조판서 홍여순을 김응남으로 경질했다. 홍여순은 맡은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군졸들의 원망이 많았다. 이어서 선조는 류성룡을 장수들의 감독과 격려를 총괄하는 도체찰사로, 김응남을 부사로 삼았다.

20일에 선조는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제수하고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하면서 말했다. “이일 이하 누구든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참(斬)하라.”

이윽고 선조는 1591년에 서인 정철 일당(一黨)으로 몰려 의금부에 갇힌 전(前) 의주목사 김여물을 석방하여 신립의 종사관으로 삼았다. 신립과 군사 수백명이 출정하자 도성 사람들은 시장 문을 닫고 지켜보았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7일)

백성들은 1583년에 함경도에서 이탕개의 난을 진압한 신립이 이번에도 왜적을 무찔러 주길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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