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와당연구가

고대 중국에서도 천하를 통일한 황제가 나오기 전에는 치자를 왕(王), 혹은 공(公)이라고 했다. 역사상 가장 먼저 칭왕(稱王) 한 군주는 초나라 웅통(熊通)이며 무왕으로 불린다. (BC740~690)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정착하지 못했던 춘추전국시대 고국 노(魯)나라, 제(齊)나라 통치자의 존칭은 ‘공(公)’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가운데 제일 먼저 칭왕을 한 나라는 고구려다. 신라는 5세기 말까지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칸(干), 거서간(居西干) 혹은 매금(寐錦)이라고 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 “고려왕(고구려왕)은 신라 매금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칭왕을 한 시기는 고구려 영향력에서 벗어가는 6세기 초(503AD) 지증왕(智證王)부터다.

충주 고구려비는 최근 과학적 조사 결과 제액(題額, 비문 전면 맨 위 부분 가로로 쓴 비 제명)에서 영락(永樂, 광개토대왕 시 연호)이라는 글씨를 판독함으로써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 비문으로 굳혀져 가고 있다. 대왕이 남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신라 매금을 불러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척경비(拓境碑)로 판단된다.

왕자명 고구려 와당 (제공: 이재준 와당연구가) ⓒ천지일보 2020.5.20
왕자명 고구려 와당 (제공: 이재준 와당연구가) ⓒ천지일보 2020.5.20

여기 소개하는 와당은 정면 이마와 주연(周緣)에 ‘王’자를 넣은 특별한 유물이다. 왕국의 풍모를 자랑이나 하듯 눈을 부릅뜬 대형 용면을 배치했다. 또 4면에 정연하게 대칭을 이룬 王자는 대고구려의 지배자임을 과시하는 것 같다.

용면 이마에 새긴 왕자는 고구려시기 유행한 예서체로 보인다. 눈은 1조의 선문으로 돌려 튀어나오게 했으며 눈썹은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다. 코의 주름은 생략되어 두 개인데 들창코다. 입은 크게 벌리고 있으며 혀를 표현했다.

사면의 왕자는 네모진 홈을 만들고 그 안에 글씨를 양각으로 새겼다. 그리고 다른 와당과 다른 점은 외구에 연주문대와 1조의 선문대를 돌린 점이다. 이는 장식성을 가미한 것으로 후대에 와당 주연부에 장식한 연주문대(聯珠文帶)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경 25㎝, 두께 4.3㎝, 주연 1.2㎝, 모래가 적은 경질이며 적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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