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와당연구가
고대 중국에서도 천하를 통일한 황제가 나오기 전에는 치자를 왕(王), 혹은 공(公)이라고 했다. 역사상 가장 먼저 칭왕(稱王) 한 군주는 초나라 웅통(熊通)이며 무왕으로 불린다. (BC740~690) 공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하면서 정착하지 못했던 춘추전국시대 고국 노(魯)나라, 제(齊)나라 통치자의 존칭은 ‘공(公)’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가운데 제일 먼저 칭왕을 한 나라는 고구려다. 신라는 5세기 말까지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칸(干), 거서간(居西干) 혹은 매금(寐錦)이라고 했다. 충주 고구려비에는 ‘高麗大王○○○○新羅寐錦世世爲願如兄如弟’라는 내용이 보인다. 바로 “고려왕(고구려왕)은 신라 매금과 오래도록 형제와 같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칭왕을 한 시기는 고구려 영향력에서 벗어가는 6세기 초(503AD) 지증왕(智證王)부터다.
충주 고구려비는 최근 과학적 조사 결과 제액(題額, 비문 전면 맨 위 부분 가로로 쓴 비 제명)에서 영락(永樂, 광개토대왕 시 연호)이라는 글씨를 판독함으로써 4세기 후반 광개토대왕 비문으로 굳혀져 가고 있다. 대왕이 남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신라 매금을 불러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척경비(拓境碑)로 판단된다.
여기 소개하는 와당은 정면 이마와 주연(周緣)에 ‘王’자를 넣은 특별한 유물이다. 왕국의 풍모를 자랑이나 하듯 눈을 부릅뜬 대형 용면을 배치했다. 또 4면에 정연하게 대칭을 이룬 王자는 대고구려의 지배자임을 과시하는 것 같다.
용면 이마에 새긴 왕자는 고구려시기 유행한 예서체로 보인다. 눈은 1조의 선문으로 돌려 튀어나오게 했으며 눈썹은 하늘로 치켜 올라가 있다. 코의 주름은 생략되어 두 개인데 들창코다. 입은 크게 벌리고 있으며 혀를 표현했다.
사면의 왕자는 네모진 홈을 만들고 그 안에 글씨를 양각으로 새겼다. 그리고 다른 와당과 다른 점은 외구에 연주문대와 1조의 선문대를 돌린 점이다. 이는 장식성을 가미한 것으로 후대에 와당 주연부에 장식한 연주문대(聯珠文帶)의 원형임을 알 수 있다. 경 25㎝, 두께 4.3㎝, 주연 1.2㎝, 모래가 적은 경질이며 적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