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하도의 해질녘 풍경 ⓒ천지일보(뉴스천지)

목포의 근대역사를 찾아서
<난중일기> “된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천지일보=김미정 시민기자]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한산대해전 등 무려 14차례에 걸쳐 왜와 싸워 이긴 이순신 장군의 흔적은 전남 목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로 고하도다.

목포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섬은 반달 모양을 하고 있으며 고하도(高下島) 고하도(孤霞島) 보화도(寶和島) 비하도(悲霞島) 등 불리는 이름만 여럿이다. 지형이 용과 닮아 ‘용머리’,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병풍도’ ‘병풍바위’라고 불리기도 하며, 반달모양이 꼭 칼날과도 같아 ‘칼섬’이라고도 한다.

충무공은 명량승첩 이후 1597년 10월 29일부터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옮기기까지 고하도에서 머문다. 그가 고하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하도는 둘레가 12㎞로 짧은 편이지만 서남해에서 내륙으로 연결되는 영산강의 문 역할을 하는 지리적 특성이 있다. 이곳이 무너지면 호남의 곡창지대에 흐르는 영산강을 왜구에게 내어주는 셈이다. 다시 말해 고하도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 고하도진지 이충무공유적 제10호 ⓒ천지일보(뉴스천지)

고하도의 위치상 곡창지대뿐만 아니라 울돌목과 제주도를 통하는 바닷길이다. 이순신 장군은 “밤 두 시쯤에 출항해 목포로 향해했다가 보화도(현재의 고하도)에 정박하니 된하늬바람(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진을 치고 집을 짓기로 계획했다”며 <난중일기> 병술년 12월 7일자에 고하도의 전략적 가치를 설명했다.

충무공은 고하도에 머물면서 조선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일종의 선박운항증인 해로통행첩을 발행했다. 이에 따라 검문·검색과 더불어 군량 확보 부분에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당시 조정에서 군량미 등 보내주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장군은 모든 부분을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로통행첩에 대해 더 살펴보자. 이순신 장군은 배 주인이 적군의 첩자인지 해적인지 여부를 조사해 해로통행첩을 발부했다. 큰 배는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을 각각 통행료로 받았다. 쌀을 기준으로 1석당 144㎏이다. 충무공의 지혜로 열흘도 안 돼 1만여 석의 군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이충무공 고하도유허비 지방유형문화재 제39호(앞면) ⓒ천지일보(뉴스천지)
고하도에는 충무공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해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지방유형문화재 제39호)가 세워져 있다. 비석은 1722년 충무공의 5대손인 이봉상이 건립했으며, 남구만이 비문을 짓고 조대구가 글을 썼다. 또한 지역 자체를 충무공의 유적지로 지방기념물 제10호로 지정해 충무공 뜻을 기념하고 있으며, 목포에서는 이충무공 기념 사업회를 조직해 매년 4월 28일이면 공의 정신을 추모하는 탄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충무공고하도유허비는 일제 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져 있었으나 해방과 동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1949년에 비각을 건립, 1963년 1차 중수, 1974년 9월 24일 지방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비문은 17행 48자가 새겨져 있다. 주요 내용은 ▲정유란 때 이충무공이 전진기지로 고하도를 설정하게 된 과정 ▲인조 25(1647)년에 당곶진(현 목포시 이로동 하당)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충무공의 유허가 소실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오중주통제사가 유허비 건립을 주도한 점 ▲전쟁 시 군량미의 중요성 ▲후임 통제사로 하여금 고하도 유지임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이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 등이 골자다.

비문 뒷면에는 숭정기원후구십오년임인팔월(崇禎紀元後九十五年壬寅八月)로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는데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면에는 일제 강점기 때 부분적으로 손실된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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