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밀양부사 박진의 용맹

1592년 4월 15일에 동래성에서 도망친 이각은 동래 소산역에서 밀양부사 박진(1560~1597)을 만났다. 박진은 급히 동래로 가다가, 동래성이 함락되자 소산에 머물고 있었다. 이 때 박진은 이각에게 “소산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이 위태하니 내가 앞을 막거든, 공은 그 뒤를 지키라” 하면서 5백명을 거느리고 왜군 앞에 진을 쳤다. 그러나 이각이 도망쳐 후방이 없어지자 박진도 후퇴하여 밀양으로 돌아왔다. (박동량 ‘기재사초’)

16일에 고니시는 길을 나누어 한패는 언양을 침범하고 다른 한패는 밀양을 침범했다. 이때 박진이 군관 이대수와 김효우 등 5백명과 함께 작원강(鵲院江)의 좁은 잔교(棧橋)를 점거하여 활을 쏘면서 버티자 왜군이 감히 진격할 수 없었다.

작원강 잔교는 밀양시 삼량진읍 검세리 작원마을과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사이에 있는 험한 벼랑길인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棧道)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얼마 뒤에 왜군이 양산을 함락시키고 우회하여 후면으로 쳐들어왔다. 이러자 잔교를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박진도 성으로 돌아와 무기고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하였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에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박진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 도망치기 바쁜 경상감사와 수령들

한편 소산역에서 도망친 경상좌병사 이각은 다시 좌병영(울산)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는 좌병영을 지킬 생각은 않고 밤에 첩을 내보내면서 창고에 간직해 둔 무명 1천 필을 함께 싣고 가게 하고, 그 역시 새벽을 틈타 도망쳤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5월에 이각이 임진강 진중에 나타나자, 도원수 김명원이 그를 참수했다. 이각은 적을 보기도 전에 수차례 도망친 겁쟁이였고, 탐욕은 나라가 어수선할 때도 나타나 극형에 처해졌다. 한편 이각 후임으로 경상좌병사가 된 박진은 경주성 탈환의 공을 세웠다. 9월 2일에 선조는 그에게 양피(羊皮) 옷 한 벌을 특별히 하사했다.

이윽고 4월 18일에 구로다의 3번대 왜군 1만 1천명이 김해를 공격했다. 김해부사 서예원은 남문을, 초계 군수 이유검은 서문을 지켰다. 그런데 이유검은 야경(夜警) 한다고 핑계 대고 달아났고, 서예원은 이유검을 쫓아간다며 도망가서 성이 함락되었다. 나중에 이유검은 참형 당했다. (선조실록 1592년 5월 10일)

이렇게 수령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경상좌수사 박홍, 방어사 성응길, 조방장 박종남·변응성, 안동 부사 정희적, 안동 판관 윤안성, 풍기 군수 윤극임, 예천 군수 변양우 등이 모두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 도망갔다. (조경남 ‘난중잡록’)

경상감사 김수도 변고를 듣고 진주에서 동래로 달려가다가 왜적에 놀라 다시 진주로 갔다가 거창으로 피신했다.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에게 피난하라고만 했다.

임진왜란의 재앙은 어찌 보면 국가를 보위해야 할 감사와 수령의 무능과 무책임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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