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경상 좌병사는 도망치고

왜군이 부산에 쳐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지역의 군민(軍民)과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켰다. 양산군수 조영규(전남 장성군 출신)도 5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하였다.

그런데 좌병영에서 달려온 경상좌병사 이각은 부산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는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동래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치겠다”고 핑계대고 조방장과 함께 달아나 버렸다. 송상현이 동래성을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줄행랑쳤다. 정말 비겁하다.

# 일본인도 존경한 충신 송상현

4월 14일에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기세를 몰아 곧바로 동래성으로 달려갔다. 왜군은 목판(木板) 하나를 성 밖에 세웠다.

“싸우려면 싸우고 戰則戰,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不戰則假道.”

그러자 남문루에서 송상현도 목판을 왜적에게 던졌다.

“싸워 죽기는 쉬어도 戰死易,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假道難.”

이러자 왜군은 날이 저물기도 전에 동래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15일 새벽에 왜적이 진격해 오니 성안 사람들은 놀라고 울부짖었다. 송상현은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왜군은 양산군수 조영규, 별장 홍윤관 등 모든 군민을 죽였다.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대마도 왜인 평성관(平成寬)은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송상현에게 대접을 후하게 받았다. 그는 송상현의 옷을 끌며 숨으라고 하였으나 송상현은 따르지 아니하였다. 왜적들이 송상현을 생포하려고 하자, 그는 항거하다가 죽었다.

송상현은 죽기 전에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면서 그의 부친 송복흥에게 주라고 하였다.

한편 송상현이 죽자 1591년 1월에 조선통신사 황윤길 등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던 왜의 사신 평조신(平調信)이 탄식하며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을 세워주었다.

송상현의 함흥기생 출신 첩은 왜군이 더럽히려 하자 자결하였다. 왜군은 그녀를 송상현과 함께 묻었다.

또 양인(良人) 출신 첩 이씨도 잡혔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별실에 가두었다. 나중에 그녀는 일본에 끌려가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1605년에 사명대사가 데리고 온 포로 3천명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1607년 조선통신사 경섬의『해사록』).

송상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에 간관(諫官)이 되고, 1591년 4월에 파직된 고경명(나중에 전라도 의병장) 후임으로 동래부사로 왔다. 1594년에 병사 김응서가 울산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을 때 가토는 송상현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인 정읍으로 옮겨 장사(葬事)지내도록 허락하고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다(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

부산시 송상현 광장과 전북 정읍시 정충사는 송상현 유적지이다. 또한 부산 충렬사엔 송상현과 조영규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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