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제1차 세계대전이 1919년에 끝나면서 휴전하였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국민회 중앙 총회(國民會中央總會)에서 이승만(李承晩)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이승만은 국민회 중앙 총회장의 신임장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향하였다.

덧붙이면 당시 국민회 내부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이유는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중앙 총회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도산(島山)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적임자는 이승만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워싱턴에 도착하였으나 유럽에 가는 여행권을 얻지 못하였는데 마침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원래 계획을 수정하여 구미위원부장(歐美委員部長)으로서 워싱턴에서 외교와 선전의 활동을 하였다.

도산은 국민회의 특파로 미국을 떠나 이강(李剛)이 지회장으로 있던 원동으로 파견되었으나, 선상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된 도산은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4월 5일 가주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피하기 위하여 필리핀, 홍콩을 거쳐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와 관련해 도산이 필리핀에 들렀을 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령의 국민의회, 한양의 임시정부가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세 곳에서 각각 다른 임시정부가 들어선 것은 그동안의 정황으로 보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도산은 우선 임시정부부터 통일하여 확고한 지도기관으로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는데,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노령의 국민의회와의 통합문제로 이견이 발생하였다.

구체적으로 노령의 국민의회는 상해의 임시정부를 일단 승인하였지만 양대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장하여, 원세훈(元世勳)을 통하여 상해와 노령의 임시정부가 통합하되 정부의 위치를 노령에 둘 것을 제안하면서 통합 논의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노령과 간도에서 온 인사들은 내각 전체 또는 교통부와 외교부를 제외한 부서를 노령이나 간도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다수의 인사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한편 5월 25일 상해에 도착한 도산 일행을 임정의 동지들과 교민들은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는데 당시 임정은 4월 13일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어 출범하였지만 대부분의 각료들이 부재중이었고, 그나마 있었던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도 사임한 채 상해를 떠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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