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에 재앙이 찾아와 온 세계는 멈춰 서야 했고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아가 인생의 나약함을 깨닫기 시작했고 신의 영역에 대한 궁구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근한 예로 미국에선 성경 판매량이 과거보다 60%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그렇게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는 성경은 어떤 책이길래…

성자 되신 예수는 남의 눈에 티보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음을 알라고 하셨다. 또 남의 과실을 용서하라 하셨고, 그러지 아니하면 자기의 과실도 용서받지 못할 것을 경고하셨다. 나아가 서로 사랑하라 하셨고, 또 모든 죄는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셨다.

위에 언급한 내용은 세상의 마지막이 된 오늘날 온 인류가 반드시 듣고 깨달아 지켜야 할 절대적 계명이며 참 진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학문과 종교의 결론은 바로 이것이라는 점을 귀담아들어야 할 때다.

지나간 시대는 각자 제 갈 길을 가도록 묵인했고 허물치 않았다면 이젠 ‘천택지인(天擇之人)’이라는 한 사람을 명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하늘의 모든 뜻을 전하게 했으니 이제 온 인류는, 특히 동방 땅 끝 대한민국은 더더욱 듣지 못했다 핑계할 수 없게 됐다. 이것이 공의(公義)며 공도(公道)다.

남의 허물을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게 우리 인생이다.

몇 년 전부터 유난히도 내로남불(내romance남不), 적반하장(賊反荷杖), 위선, 모순, 거짓, 가짜 등의 표현들이 세상을 뒤덮었으니 그야말로 거짓과 가짜의 홍수시대가 찾아온 것이며 이것이 어째 우연이기만 할까. 사실과 진실과 진리는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렇다. 인생은 애당초 죄와 허물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이 죄를 없애기 위해 양과 소를 희생시키며 노력해왔지만 제물이 된 짐승의 피로는 오히려 죄를 생각나게만 할 뿐 죄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던 제물은 짐승이 아닌 의인의 피 곧 독생 성자 예수의 피였다. 아버지의 그 귀한 뜻을 알았기에 인류의 죄를 없애기 위해 기꺼이 희생의 순한 양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충과 효로 말미암아 인류의 죄가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선 친히 당신을 가리켜 “길(道)과 진리(眞理)와 생명(生命)이고 문(門)”이라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분명히 할 것은 이천 년 전 흘리신 예수의 피는 “언약의 피”로써 그 흘린 피의 효력은 송구영신 호시절이며 모든 천하 만물이 학수고대해온 그 날이며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운세 곧 오늘을 약속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유언한 자가 죽어야만 그 유언의 효력이 나타나는 이치와 같다.

그러나 호시절이라 했으니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처럼 마귀의 최후의 발악이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지금 처한 이 현실이며, ‘체포 조’를 만들고 ‘살인죄’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일 공모를 하고, 그 문을 폐쇄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과 현상은 도장 찍듯이 선명하게 찍혀져 기록돼 영원히 기억될 것이니 이 또한 핑계치 못할 것이다.

흔히 선(善)과 악(惡)을 말한다. 종교는 세상에서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때를 선이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대적할 때 악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선을 권하고 악을 징치해 왔으니 바로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추구하는 하늘 민족이었다. 원래는 악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먼저 하늘 영계에서 출현했고, 그 악은 사단이 되고 마귀가 되어 온 천하를 꿰며 집어삼키고 지구촌에 똬리를 틀고 주인행세를 하며 지금 세상 군왕들과 관원들을 들어 역사하고 있다. 적반하장이 바로 여기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고, 없는 죄도 만들고 또 뒤집어씌워 이 시대의 빌라도 법정에 다시 세워 가시 면류관을 쓰고 골고다 고원을 오르게 하고 있다.

금번 코로나 사태로 희생의 땅이 되고 양이 된 대구와 시민을 기억한다. 이 대구는 비록 국민과 세계로부터 기피현상의 대상이 되고 조롱거리가 되고 광야가 됐지만, 그 이름만큼은 위대하기 그지없다. 대구(大邱, 달구벌), 온 인류가 기댈 곳이란 지명을 가졌으니 이 또한 역설이 아닌가. 나아가 천하 만민이 기대고 쉴 곳이란 의미가 숨어 있으니 그만한 인물이 약속돼 있다는 증거다. 우연의 일치일까. 대구가 낳은 한 시인이 있다. 일제 말발굽 아래서 핍박과 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회복을 시(詩)로 저항하다가 적반하장이란 말과 같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264’번의 죄수번호를 가졌던 이육사(본명 이원록), 그는 ‘광야’라는 저항시를 통해 회복될 조국 광복을 노래했으니 곧 회복의 노래 승리의 노래였다.

광야(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 (중략) …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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