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기록]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고산(孤山)이 꿈꾼 이상향
[영상기록]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 고산(孤山)이 꿈꾼 이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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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천지TV=황금중 기자] 

※본 영상은 2018년 1월에 촬영한 영상입니다.

외로운 산, 고산
고산이란 호처럼 그는 외로움을 이곳에서 달랬다.
그가 사랑했고 그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섬, 보길도다.

조선 중기의 최고 정치가
시가문학의 거장
하지만 순탄하지 않았던 그의 삶

그가 조정을 떠날 때 머무른 곳이자 여생을 마무리한 곳도 보길도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고산!
그래서 작은 섬에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만들려 했던 사상가
고산 윤선도가 꿈꿨던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남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킬로  떨어진 보길도는 땅끝 해남에서 30분 정도 배를 타고 ‘노화도’로 들어가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보길도’하면 ‘윤선도’라 할 만큼 섬 곳곳에는 그의 사연이 담긴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고산 윤선도의 이야기는 낙서재에서부터 시작된다.

윤선도의 거처 낙서재다.
그가 처음 보길도에 들어와 짓고 살았던 집이다.

그는 이곳에 책을 쌓아두고 독서를 즐겼고,
아침에 닭이 울면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낙서재(樂書齋)’라는 집 이름에서도 책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낙서재란 ‘글을 읽는 즐거움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낙서재 앞에 있는 거북 모양의 바위
고산유고 ‘귀암’ 시편에 나오는 4령 가운데 하나로  
고산은 이 바위에 올라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고산은 낙서재 뒤편의 큰 바위와 숲을 거닐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소은병은 낙서재, 거북바위와 한 축을 이루고 있어 최근 낙서재 원형 복원에 중요한 자료로 쓰였다.
윤선도는 1587년(선조20)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8살 때 큰아버지에게 입양돼 전남 해남에 내려와 살았다.

해남 윤씨 가문의 녹우당
효종 임금이 스승이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줬는데, 
그 일부를 가져와 만든 사랑채가 바로 녹우당이다.

조선 중기 남인의 영수.

윤선도는 광해군 4년, 그의 나이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 유생이 된다.

그는 바른말을 곧 잘하는 강직한 선비였다.
당시 최고의 권력자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귀양을 가게 된다. 

인조반정 후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길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본거지 해남으로 내려왔다.

윤선도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 대부분을 본거지인 해남과 이곳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냈다.

그러면 그가 보길도까지 오게 된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42세에 문과에 급제해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 곧 장차 효종 임금의 스승이 된다.
1636년 인조 14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전을 벌이고, 
해남에 있던 고산은 의병을 조직해 강화도로 향한다.

고산은 보길도와의 만남을 ‘하늘이 나를 기다려 이곳에 멈추게 했다’고 표현할 만큼 각별하게 여겼다. 

고산은 격자봉 아래 먼저 낙서재를 짓고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하나둘 만들어간다. 

높은 곳에 오르면 산세가 마치 연꽃처럼 보이는데,  
부용동(芙蓉洞)이라는 마을 이름도 그가 지었다.

그가 첫눈에 반한 보길도의 풍광은 낙원을 닮은 듯 그를 사로잡았다. 

과연 그가 꿈꾸던 낙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그린 고산 윤선도
그가 가꾼 정원, 세연정을 보면 그가 꿈꾸던 세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해 ‘세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뤄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세연정은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원림의 미학’이다.

봄가을의 꽃피는 세연정도 아름답지만,
눈이 내려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세연정에 감탄이 절로 난다.

고산은 남인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다.

고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자신이 추구하던 이상세계를 이 부용동에 고스란히 투영했다.
아름다운 경치는 사색에 빠지게 만든다.
고산은 이곳에 앉아 어떤 생각에 빠졌을까?

그는 맑은 날이면 가솔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연못에 배를 띄우고
자신이 지은 시조를 부르게 하고 
동자들에게는 채색옷을 입혀 춤추도록 했다.

건기에는 돌다리로 우기에는 폭포가 되도록 고안한 판석보는
윤선도의 과학적·건축학적 재능과 심미안의 산물이다.

그가 보길도에 세연정을 비롯한 건물 25동을 짓을 수 있었던 것은 
해남 윤씨 가문의 막대한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산의 이상주의는 그가 독서를 즐기며 신선처럼 차를 마셨던 동천석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동천석실은 낙서재 맞은 편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절벽 위에 한칸 자리 거처를 지어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 칭했다.

이곳은 고산이 보길도에서 가장 좋아했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고산은 이곳과 세연정 등지에서 여러 시와 문학을 탄생시켰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어부사시사
어부사시사는 계절마다 펼쳐지는 어촌의 정취와 어부들의 생활을 잘 노래하고 있다.

‘앞강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밀려가고 밀물은 밀려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강촌에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고산이 좇던 이상은 매번 현실 정치와 부딪히기 일쑤였다.
당파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당시 조정
그는 남인의 우두머리로 서인 세력과 맞서다 두 번이나 유배 길에 올랐다.

20년에 달하는 유배생활과 19년 가까운 은거생활
벼슬을 받고 사직한 것도 여러 번,
현실과 부딪혀 자신의 소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고산 윤선도.

81세의 나이에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보길도로 돌아와 
4년을 보낸 뒤 85세의 나이에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한다.

보길도하면 빠질 수 없는 유적지가 또하나 있으니 바로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다.

마치 하늘이 두 사람을 이곳에 오게 한 걸까.

윤선도의 정적이었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도 운명처럼 이 보길도와 인연이 있다.

흔히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자, 내일의 길잡이라 말한다.
300년이 지난 오늘도 당파와 계파 싸움, 적폐 논쟁은 여전하다.

보길도에 자신만의 이상, 낙원을 건설하려 했던 고산 윤선도.

하나 그가 바라던 세계는 어쩌면 사람의 힘으론 불가능했던 것일지 모른다.

그가 따르던 성리학의 뿌리, 유교를 비롯한 종교의 경서들에는 
신이 정한 때가 돼야만 이상세계, 천국, 무릉도원이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고산은 

모두가 바라는 이상세계, 유토피아가 
언젠가 이 땅에 나타날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상촬영: 황금중·김미라 기자, 글: 황금중 기자, 사진: 이지예 기자, 내레이션: 황금중 기자, 편집: 김미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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