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춘추 말기에서 전국 초기 군웅이 난립하자 어떤 하나를 높이 받들던 현상도 변했다. 난세는 통치집단에게 현실을 똑바로 보고 문제를 분석하라고 압박했다. 조석으로 변하는 길흉화복은 신앙에 집착을 밀어냈다. 불확실한 점복은 경건한 신앙을 잃게 만들었고, 사람들은 잡다한 기원의 대상을 찾았다. 천, 제, 각종 신령, 조상 등이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신앙의 대상으로 변했다. 진정한 의미의 일신교는 중국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일신교는 절대성을 추구하는 정치권력과 결합됐을 때 가장 융성해진다. 사람들의 사상은 독립적이고 회의적인 방향으로 발전했다. 중국 고대 인민주의는 신과의 독립을 통해 성취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인문이라는 용어는 휴머니즘의 번역이 아니라 역경 천지비괘(天地賁卦)가 출전이다.

“천문을 관찰하면 사시변화를 알 수 있고, 인문을 관찰하면 천하풍속을 완성할 수 있다.”

천지는 신성을 잃고 만물을 낳고 기르는 자연으로 인식됐다. 중국인들은 위로는 신에 대한 숭배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아래로는 물질에 대한 숭배를 자제할 수 있게 됐다.

노자, 공자, 묵자가 사조를 일으키면서 이성적 태도가 인식을 주도했다. 제자백가가 경험과 이성을 중시하자, 신도는 주류에서 밀려났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은 의심과 추리로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상과 물체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며 항상 상호작용한다. 모든 것은 억측일 수 있으므로 인식, 분석, 연구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점복보다 경험적 사실을 기초로 이성적 분석을 통해 삼라만상과 맞섰다. 노자는 점복에 대한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도, 음양, 무 등 철학적 개념의 범주에서 육합의 바깥에 있는 신적 존재를 철저히 배제했다. 노자에게 무는 도론의 핵심이었다. 거기에는 신과 귀신이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공자는 주역에서 복서의 성분을 과감히 잘라냈다. 그는 괘효의 변화를 철학적 형식으로 설명했다. 논어에는 오행에 관한 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역을 도덕철학으로 개조했다. 공자는 역의 가치를 괘효의 변화와 순서라는 형식적 구조가 사물의 일반적 규칙을 인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철학적 이론으로 체계화해 하나의 틀을 만들었다. 이러한 공자의 인식은 한초에 상수역학에 반발해 의리역학을 발전시킨 왕필(王弼)에게 계승됐다. 주역에 대한 공자의 인식은 후대 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사상사와 문화사에서 중요한 역전(易傳)이 모두 공자의 저술은 아니다. 역전은 기상(氣象)에서 인사에 이르기까지 자연현상의 보편성을 이용해 유가의 사회적 인사에 대한 일반규율을 정당화했다. 묵자는 점복과 오행상승이라는 형식의 틀을 완전히 부정했다. 풍부한 실천적 경험을 통해 묵자는 오행의 상극에 따른 종시순환론(終始循環論)이 사물의 인과관계를 반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묵자의 이성적 태도에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경험적 지식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감각이 객관적 사물의 신뢰성을 반영한다고 믿었다. 둘째는 명사는 실질적 속성과 부합해야 하며, 분명한 이유를 관찰해 사물을 분류해야 한다는 분석적 방법을 중시했다. 그는 개념의 타당성은 사실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질적 재료, 기하학적 형상, 속성과 기능 등 일정한 방식에 따라서 사물의 분류하고 개념화함으로써 사물의 본질과 연관된 인식의 기초를 마련했다. 인과관계의 객관적 존재를 긍정한 그는 경험적 지식과 이성적 분석을 결합시켜 언어적 개념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이성적 각성으로 자아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높아졌고, 사람과 자연,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개인의 주체의식과 자신감이 강화됐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자연과 사회에 대한 그림이 완전히 변했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 따라 자연과 사회를 인식하고, 자기의 이상세계를 그렸다. 노자, 공자, 묵자는 나중에 탁고개제(托古改制)한 것도 적지는 않았지만 제자백가의 출발점으로 고대 혁명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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