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일본, 조선을 침략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가도입명(假道入明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내주라)을 요구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고, 한·중·일 국제전쟁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조선이 거부하자 히데요시는 규슈의 나고야에 침략기지를 만들고 육군 28만명과 수군 1만명을 편성했다.

1592년 4월 13일 오전 9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1만 8700명을 태운 왜선 7백여척이 대마도를 출발했다. 여기엔 5천명의 군사를 거느린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도 있었다. 고니시의 사위 요시토시는 일본 사신으로 조선을 여러 번 다닌 화친파였다.

왜군은 오후 5시경 부산포에 상륙했다. 왜선을 맨 먼저 발견한 곳은 가덕도의 응봉 봉수대였다. 봉수대는 즉시 보고했다.

“13일 오후 5시경, 대략 90여 척의 왜선이 가덕도 남쪽에서 부산포를 향하여 항해 중인데 그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습니다.”

이 보고는 곧바로 경상도 군영에 알려졌다. 그런데 부산 앞바다에서 왜선을 막아야 할 경상좌수군은 아예 출동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저지가 전혀 없자 왜군은 의아했다. 하룻밤을 잘 자고 난 왜군은 14일 새벽에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 부산 첨사 정발, 순국하다.

부산 첨사 정발은 13일 오후에 왜선이 바다를 덮어올 때 절영도(부산시 영도구)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朝貢)하러 오는 배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다. 박동량이 지은 <기재잡기>에는 “정발이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조공선(船)이라 여기고 염려하지 않았다가 왜선이 가까이 오면서 총을 연달아 쏘니 당황하여 진영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급히 성에 들어온 정발은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장님을 시켜 퉁소를 불게 해서 군민(軍民)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였다.

14일에 왜군은 삽시간에 성을 에워싸고 성 밖 높은 곳에 올라가 조총(鳥銃)을 비 오듯 쏘아댔다. 정발은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싸웠지만 조총 앞엔 무력했다.

1543년에 포르투갈 상인이 준 귀신 같은 무기 조총은 위력이 막강했는데, 조선 장수는 조총을 과소평가했다.

류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자.

“1592년 4월 초하루에 내가 신립에게 조총의 위력을 걱정하자, 신립은 조총이라고 쏠 때마다 다 맞힌답니까 라고 말했다.”

성은 한나절 만에 함락되었고, 정발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했다. 18세의 첩 애향도 정발 곁에서 자결하였다. 정발은 무과 급제하여 거제현령을 하였고 1592년에 부산첨사가 되었다.

 

# 허둥지둥 달아난 경상좌·우수사

이러자 경상 좌수사 박홍은 아예 성을 버리고 언양으로 달아났다. 이어서 왜군은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부산시 사하구)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 군현(郡縣)의 군사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쳤다.

부임한 지 2개월 된 경상우수사 원균도 왜적이 거제도로 온다는 풍문만으로 전함을 모두 침몰시키고 남해에서 육지로 올라가려 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5월 1일)

1591년에 원균은 전라좌수사로 제수되었으나 사간원이 이전에 수령을 할 때 근무성적이 최하위였음을 이유로 반대하여 선조가 임명을 취소했다. (선조실록 1591년 2월 4일)

충신 정발과 윤흥신은 부산 충렬사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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