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소설가 문화칼럼니스트

그때 내가 교회에 간 것은 순전히 선물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교회에선 필통이나 연필 같은 선물을 나누어 주기도 했고 평소 구경하기 힘든 과자나 사탕을 얻어먹을 수도 있었다. 물론, 크리스마스 때 느닷없이 등장하면 너무 속보였으므로 12월 초쯤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었다. 코흘리개 철부지였을망정 그 정도 눈치코치는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는 참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익숙하지 않은 찬송가를 따라 부를 때는 왠지 어색한 기분에 교회 천장을 쳐다보기도 하고 기도를 할 때는 언제 끝나나 생각하며 옆 사람을 훔쳐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학용품 따위를 받아 들면 새 학년이 기다려지고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해 교회 나들이는 땡이었다. 교회의 달콤한 기억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연필의 심처럼 닳아져갔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예수님의 얼굴과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도 까마득하게 잊었다.

그렇게 새 학년 새 학기를 끝내고 여름 방학이 되면, 우리들은 외출복 겸 실내복인 ‘난닝구’ 따위를 입고서 구슬치기를 하거나,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처박으며 곡예비행을 하는 제비들을 쳐다보면서 무료함을 달랬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거나 골목길에 돗자리를 깔아 놓고 만화를 뒤적이기도 했다. 영화에서처럼, 조오련하고 거북이하고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하거나, 김일 머리에 쇳덩어리를 박았다는데 진짜 맞나, 남진이 미국의 가수왕(나중에 그가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걸 알았다)한테 가서 뺨을 석 대 맞는 대신 그의 옷을 입어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는데 맞는 말일까, 뭐 이런 되지도 않은 말들을 지껄이기도 했다. 이럴 때 십중팔구 맞네 안 맞네 목소리를 높이고 급기야 주먹을 휘둘러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그때, 코피 흘리면 무조건 졌다!).

아무튼 도시는 적막했고 아이들은 무료했다. 아이들이 물기 빠진 잎처럼 시들어져갈 즈음, 어디선가 경쾌한 음악소리가 들려오고 마침내 왁자한 소리와 함께 아이들 무리가 나타나곤 했다. 곧 여름성경학교를 열겠으니 어린 양들은 주저 말고 교회로 나오라며, 아이들이 행진을 하는 것이었다.

여름성경학교에 가면,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거나 심지어 물 위를 걷기도 했다는 예수님의 무궁무진한 활약상을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집으로 돌아갈 때는 ‘아이스케키’ 맛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여름성경학교의 ‘아이스케키’와 함께 우리들의 무료한 여름이 지나갔다.

우리들이 비록 크리스마스나 여름성경학교 때에만, 선물에 눈이 어두워 혹은 ‘아이스케키’의 유혹 때문에 ‘나이롱’ 신자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가슴 한 구석에 양심이라는 것이 눈곱만큼 있었던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남의 물건을 훔친다든지 하는 등의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 정도는 있었다.

더 이상 교회와의 인연은 없었지만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어린 날의 교회에 대한 기억은 따뜻하고 정겹다. 비록 ‘나이롱’이었지만, 교회 덕분에 선한 것에 대한 의지나 믿음 같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내 가슴 속 아름다운 교회의 추억은 그 이후 수없이 보고 들었던 교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나는 다만, 여름성경학교의 ‘아이스케키’처럼, 그 기억들이 언제까지나 달콤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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