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보수는 죽어야 해. 그것도 가능한 빨리. 그래야 빨리 부활할 수 있거든. 그런데 죽으려고 하지 않으니 다시 살아날 수가 있나.” 2018년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뒤 김병준 비대위 체제로 막 들어가던 시점에서 이문열 작가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문열 작가는 당시 비대위원장 후보에 이름까지 올랐지만 그는 한국당을 향해 거침없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 후 황교안 대표 체제가 됐을 때도 죽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무슨 혁신이 되겠냐며 혹독한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이문열 작가가 ‘죽음’까지 거론할 만큼 과격한 표현을 썼지만 그의 충고는 별로 수용되지 않았다. 말로는 환골탈태의 결의로 넘쳐났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말뿐’이었다. 누구하나 나서서 책임지는 지도자도, 속죄를 구하며 정계를 떠난 인사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이미 했던 불출마 선언까지 번복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그러니 당시 비대위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 끝은 황교안 대표의 미래통합당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도로 박근혜’로 돌아가는 신호탄이었다. 거대한 비극의 탄생은 이렇게 이어졌다.

황교안 대표의 통합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막장 국회’의 주역이었으며, 극단적 ‘진영 싸움’의 완결판을 보여줬다. 전광훈 목사와 다정히 손잡고 장외 집회에서 여론을 선동하던 그 장면은 황교안과 통합당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미래는커녕 국민의 눈높이도 따라가지 못했다. 극단적 수구세력에 파묻혀 천지분간도 못하는 최악의 늪으로 빠져 버린 것이다. 이문열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살아 움직이면서 통합당을 망쳐버린 것이다.

21대 총선을 통해 표출된 여론은 통합당을 향해 사실상 ‘해체’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역대 선거에서 통합당이 이처럼 완벽하게 무너진 적은 없었다. 이번엔 국민이 직접 ‘사즉생(死卽生)’의 회초리를 든 것이다. 이문열 작가가 말했던 그 ‘죽음’의 의미가 각인되는 결과였다. 그러나 통합당 참패가 기정사실로 될 때 쯤 황교안 대표는 서둘러 대표직 사퇴를 선언하고 떠나버렸다. 다시 살아서 귀환하겠다는 무언의 메시지일까. 야권 대선주자 1위를 달리던 제1야당 대표의 행태 치고는 무책임하다 못해 비겁하고 졸렬하다. 게다가 최악의 참패를 당했지만 이번에도 그 책임자들은 어물쩍 넘어가는 분위기다.

통합당 최고위가 22일 당을 이번에도 비대위 체제로 꾸려가기로 결정했다. 소속 의원들과 당선인들의 전수조사 결과라는 말도 덧붙였다. 게다가 비대위원장은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맡는다고 밝혔다. 전형적인 구태의 반복이요,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겠다는 책임 회피용 ‘여론 물타기’에 가깝다. 한마디로 ‘죽음’을 선언해야 할 책임자들이 김종인 뒤에 숨어서 또 기회를 엿보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하필 또 김종인 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당 내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 결국 소나기 퍼부을 때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한 ‘면피성 대책’이라면 참으로 고약한 사람들이다.

통합당의 새로운 지도부와 당의 진로는 이제 21대 총선 당선자들과 당원들에게 맡겨야 한다. 20대 국회 후반기의 막장 정치를 재연하고 차기 대선마저 망치려는 심사가 아니라면 떠날 사람은 떠나야 한다. 지금이라도 이문열 작가의 쓴소리 그대로 ‘결단’해야 한다. 최소 수 십 명은 될 것이다. 그래야 그 바탕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있으며, 통합당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막장의 주역, 총선 참패의 주범들이 여전히 살아서 당의 새로운 판세까지 좌지우지 하려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번에도 절망이다.

그런데 21대 국회에 입성하는 103명의 당선자들마저 지도부의 구태의연한 처방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들 가운데도 생각이 있고 인재가 많을 텐데 왜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열어가지 못하고 또 외부 인사에게 맡기려 하는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과거 책임회피용 비대위 체제의 허상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게다가 당의 운명을 건 치열한 토론이나 진지한 고민도 없다. 마치 죽은 듯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통합당의 오늘과 내일을 압축적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아주 늦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선자들 모두가 어느 조용한 거처로 가서 몇 날 밤을 지새워서라도 머리를 맞대고 자신들의 길을 찾아야 한다. 당선자들 가운데서 ‘뉴리더’를 찾아내고, 스스로의 눈으로 미래를 보고 자신들의 심장으로 현실과 맞서야 한다. 툭하면 외부 인사에게 당의 운명을 맡기는 것도 자주 하면 ‘불치병’이 된다. 103명의 당선자들을 뽑아준 당원과 국민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황교안 없는 지도부로 인해 당장은 비대위 체제로 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비대위는 짧을수록 좋다. 그래야 ‘비상’을 빨리 털어낼 수 있으며, 21대 총선을 망친 책임자들에게 제대로 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 연장에서 전당대회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당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 중진이 아니어도, 대중성이 약한 신인도 좋다. 희망은 늘 새로운 생명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당의 ‘역동성’도 살아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참에 통합당의 강령과 정책기조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한다. 입만 열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수구냉전식 패거리 논리를 걷어내고 이제는 ‘국민’을 중심에 세워야 한다. 코로나에는 좌파도 우파도 없다. 이것이 20대 국회의 막장 정치와 결별하는 통합당의 새로운 가치다. 통합당과 가까운 이문열 작가가 말했다. 죽어야 할 것들은 빨리 죽어야 한다고. 그것도 확실하게. 통합당의 새로운 생명들, 이제 그들이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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