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경기 안성(양성) 무한산성 고지도
경기 안성(양성) 무한산성 고지도

덕뫼 마을 덕봉서원

덕봉서원(德峰書院)은 무한산성 아래 덕뫼 마을 뒷산에 있다. ‘덕뫼’란 큰 성 즉 무한성을 지칭한 말이다. 조선 숙종 대 관찰사를 지낸 충정공 오두인(吳斗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원이며 해주 오씨인 정무공 오정방, 천파공 오상 등의 위패를 모셨다. 1695년에 처음 세웠는데 그 이듬해에 ‘덕봉(德峰)’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오두인은 어떤 인물인가. 숙종 5(1679)년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 중에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세 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의 의열사(義烈祠), 양성의 덕봉서원, 의성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다. 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사우(祠宇), 10칸의 정의당(正義堂), 동재·서재·외삼문·내삼문·홍살문 등이 있다.

멀리서 바라본 무한산성
멀리서 바라본 무한산성

양성 이씨 이승소·이영남 장군의 고향

양성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본향(本鄕)이라는 점이다. 양성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이씨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양성 이씨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사람이다. 문종 때 고려에 와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에 이르렀고, 양성군(陽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양성 이씨 족보에 따르면 능숙한 외교술로 거란과의 외교를 성공시켜 정난공신으로 책훈되었고, 그에 대해 양성(陽城)을 식읍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양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양성 이씨 가운데 제일 크게 된 인물은 세종 때 문신인 양성군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이영남(李英男) 장군이다. 삼탄은 시를 잘 지어 세종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미인(美人)>이란 시는 매우 그윽한 맛이 있다.

한가히 서로 바둑을 두다가

요염한 봄빛에 이끌려 돌 놓는 것이 더디네

손으로 고운 뺨을 괴니 무한한 생각

복사꽃 가지 위에서 꾀꼬리가 운다.

(閑來相與鬪圍碁 却被春嬌下子遲 手托香腮無限意 桃花枝上囀鶯兒/ <삼탄집> 권9)

허균은 이 시를 두고 ‘염정시의 좋은 맛을 고기 한 점으로 음식 전체의 맛을 알듯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치하했다. 한 문학 평론가는 ‘고운 뺨을 괴고 아마도 그리운 님을 생각하나보다. 결구는 미인에 조응된 꽃과 새다. 미인에 어울리는 꽃은 복사꽃이고 새는 꾀꼬리다. 어찌 보면 미인에 어울리는 평범하지만 알맞은 소재들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간절한 그리움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고 평했다.

삼탄(三灘)은 17세 어린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이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임명되었다. 이어 부교리·응교에 승진하고, 단종 2(1454)년에 장령(掌令)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67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리기도 했다.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 사무를 능숙하게 처리하였다. 성종 2(1471)년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해졌다.

성품은 원만하고 독서를 좋아해 예(禮)·악(樂)·병(兵)·형(刑)·음양(陰陽)·율(律)·역(曆)에 두루 통달했다고 한다. 재물을 탐하지 않아 가난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영남(1566~1598) 장군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선조 17(1584)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 훈련원 첨정, 도총부경력 등을 지냈다. 선조 25(1592)년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휘하의 율포만호로 전임, 임진란 발발 당시 원균을 도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왕래하며 청군(請軍)하였다.

선조 28(1595)년 태안군수, 강계부 판관에 전임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이듬해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이 패사(敗死)한 후 조방장으로 진도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선무원종공신 일등 병조판서로 추증했다.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기록되는 인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좌의정 이덕형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통제사 이순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중국 군사와 합세해 진격하니 왜적이 대패해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왜선 200여 척이 부서져 죽고 부상당한 자가 수천 명입니다.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했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이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남은 적선 100여 척은 남해로 도망쳤고 소굴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왜선이 대패하는 것을 보고 도망쳤습니다.

진천의 구읍지인 <상산지(常山誌)>에는 ‘충무공이 일찍이 시를 주어 말하기를 북쪽으로 가서는 괴로움을 같이 하고 남쪽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하자고 했으니 두 공이 같은 날 서로 뜻이 맞았음을 볼 수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래도 사복홀의 고구려 상무적 기상을 받은 것만 같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중요 유적 무한성과 주변의 유적들은 햇빛을 찾아야 한다. 확대된 발굴조사 등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중요한 유적을 방치하는 것은 문화국으로서 부끄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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