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마한의 고지 백제가 쌓은 큰 성에 석축 흔적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안성 무한산성 석축
안성 무한산성 석축

고구려가 지배한 한천 ‘사복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을 고구려 시대에는 ‘사복홀(沙伏忽)’이라고 불렀다. 양성면을 흐르는 큰 내는 바로 큰 내, 한천(漢川)이다. 지난해 12월 오산 독산성을 취재하면서 들렀으니 이곳에 대한 답사가 두 번째다. 한천은 비옥한 안성을 휘감고 흘러 서해 아산만에 이른다. 문화의 내(川)이자 역사의 강이다.

<동국여지승람> 양성현 건치 연혁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본디 고구려의 사복홀인데 신라 경덕왕이 적성이라 고쳐서 백성군 속현으로 만들었다(本 高句麗 沙伏忽 新羅景德王改 赤城 爲白 城郡領縣云云).

여기서도 충북 단양 적성(赤城)과 똑같은 이름을 접하게 된다. 한국은 어딜 가나 비슷한 이름들이 많다. 그래서 학자들이 고대사에 나타난 지명을 비정하면서 오류가 많다. 학자들 간에 일제강점기부터 100년 가까이 논쟁이 되는 곳도 있다.

<여지승람>에는 양성의 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쪽으로 안성군 경계까지 3리이고 남쪽으로 충청도 직산현 경계까지 27리이며 서쪽으로 진위현 경계까지 15리이다. 북쪽으로 용인현 경계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12리이다.

직산(稷山)은 마한시대 수장국인 목지국(目支國)의 고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구려는 백제 땅인 이곳을 점령하여 사산성(蛇山城)을 만들었다. 27리는 보병을 주축으로 한 군사 대오가 반나절이면 족히 갈 수 있는 거리다. 이곳 사복홀과 사산성은 거리가 얼마 안 돼 유사시 군사들을 서로 지원할 수 있는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부산현(釜山縣)인 진위(振威. 평택시 진위면)까지는 불과 15리이다. ‘부산’은 고구려 시대 연달부곡(淵達部曲)으로 금산(金山)이라고도 불렸으며 송촌활달(松村豁達)이란 이름도 있었다(<동국여지승람> 권10 진위현조). 이 지역은 고구려 지명이 집중된 곳이다. 안성을 지배하면서 많은 고구려 세력이 정주했음을 알려주는 것인가. 이곳에 있었던 부산(釜山) 고성, 무봉산성(舞鳳山城)도 글마루 고구려유적 시리즈 취재 대상이다.

‘홀(忽)’은 성을 지칭한다고 했다. ‘사복(沙伏)’은 ‘새 밝이’ ‘새 밝골’ 또는 ‘새 밝성’과 같다는 뜻이다. 신라 통일 후 경덕왕 때 이를 한자를 차용하면서 양성(陽城)이 되었다. 적성의 적(赤) ‘양성’도 ‘밝’과 관계가 있다.

이 같은 지명을 종합해 볼 때 사복홀은 매우 중요한 고구려 요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성은 백운산고성(白雲山古城) 혹은 무한성(無限城)으로 <여지승람>에 기록된다(無限城 在縣 南 十二里 石築 周 一千三百 五尺 內有一池).

이 성에는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일까. 진정 고구려 세력이 군사력을 두어 지킨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유구나 유물은 또 어떤 것인가.

경기 안성(양성) 무한산성 고지도
경기 안성(양성) 무한산성 고지도

마한의 고지 백제 지배를 빼앗은 고구려

본래 안성 양성 땅은 마한(馬韓)의 고지였다. 비옥한 안성평야를 가로 흐르는 한천 유역에 발전한 고 문화국이었다. 마한시대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수장국 목지국의 직접 통할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후학들이 연구할 과제이기도 하다. 성의 규모가 전장 1㎞에 육박하는 것을 보면 독립된 나라가 존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성현 고적조 및 성지 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무한성(無限城) 현 남쪽 12리 지점에 있는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3백5척이며, 성의 안에 못 하나가 있다.

<양성읍지(광무 3(1899)년)>에도 이 유적이 나타난다. ‘무한성(無限城), 고성산 서쪽 수리(數里) 지점에 있다. 전해오기를 백제(百濟)가 쌓은 것이라 하는데 지금은 다만 둘레가 남아 있고 가운데에 못이 있는데 속칭 용추(龍湫)라고 한다. 그 위에 기우제단(祈雨祭壇)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매계 강호문(梅溪 康好文)은 공민왕 때 인물이다. 그는 시문에 능했으며 공민왕 11(1362)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가 무한성을 지나며 멋들어진 시를 썼다. 당시에는 이 지역을 수원의 옛 이름인 용성으로도 불렀던 모양이다. <여지승람>에 절구가 실려 있다.

용성(龍城) 깊은 지역에 외로운 성이 있는 데

고을 이름은 간의(諫議)의 명(名)자와 같다

옛 시를 뒤쫓아 화답하며 오래 앉았으니

숲이 먼 주막에 낮 닭이 우네

(龍城深處有孤城 邑號聊同諫議名 追和舊詩成坐舊 隔林茅店午鷄鳴)

강호문의 부인 문씨(文氏)는 광주 갑향(光州甲鄕) 사람인데 우왕 14(1388)년 왜구에게 붙들려가는 도중 몽불산(夢佛山) 극락암 근처에서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이에 왜구는 그의 큰아들을 죽이고 돌아갔으며, 부인은 나무덩굴에 걸려 오른팔이 부러진 채 구출되어 열녀(烈女)로 정문을 받았다.

오정(梧亭) 박란(朴蘭)은 조선 전기 유명한 문신이다. 함경도 북평사를 보좌했으며 고원군수를 지냈다. 대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낸 집안인데 무한성을 지나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아홉 마리 용이 구름 타고 누각위로 올라갈 때

성(城)을 지나갈제 비가 내리는데

백제 옛 나라는 없어 졌네

명사들이 무한고성의 그윽한 풍경을 읊고 있는 것이다.

경기 안성 무한산성
경기 안성 무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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