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김남조(1927 ~  )

내 구겨진 문서는

백군청군의 운동회처럼 부산하더니

저물녘엔 낙엽 더미 아래 고요하다

더 은밀한 문장은

한밤의 내 불면이며

아침에 펴 보니

글씨 없는 백지이다.

 

[시평]

김남조 시인은 오늘 우리 시단 원로 시인 중 가장 원로분이다. 이제 연세가 90이 넘은, 오랜 시력을 지닌 시인이다. 한 생애의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는 기나긴 시간을 시와 문학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시인이다. 이제 그 살아온 생애의 저물녘에 이르러, 지나온 생애와 지금의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시이다.

지나온 시절은 마치 백군과 청군으로 나뉘어서 서로들 자신의 편 이기라고 응원을 하며 떠들던, 그렇듯 부산스러운 삶이었지만, 이제 인생의 저물녘에 이르러, 떨어져 쌓인 낙엽 더미 아래, 고요히 그 낙엽에 덮여 있는 듯한, 그러한 삶,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무엇도 관조를 할 수 있는, 그러한 삶에 이르고 있다고 술회하고 있다.

노시인의 오늘도 밤을 밝히며 시를 쓴다. 밝힌 불빛 아래에서 시의 맑은 물 퍼 올리느냐고, 노시인의 밤은 불면으로 이어진다. 밤이 새도록 퍼 올린 시의 맑은 물, 그 은밀한 문장들을 아침을 맞아 열어보니, 아무러한 글씨도 없는 다만 백지, 백지일 뿐이다. 한 생애를 살아오면 쓴 모든 시들,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백지와 같이 가장 순수한 상태로 오늘 노시인의 앞에 펼쳐지고 있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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