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초빙교수

 

기억이 하도 가물가물해서 신문사 PDF 지면을 찾아봤다. 정확히 41년 전의 일이다. 1970년 5월 31일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는 안데스 산맥 자락의 페루에서 최악의 지진이 발생했다. 지축이 흔드는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땅이 가라앉고 솟구치며 뒤틀리는 강력한 지진으로 페루는 일순간에 지옥을 방불케 했다. 주요항구인 침보테항 70%가 파괴되고 7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초대형 재앙이 벌어졌다. 이 지진은 역사상 세계 10대 지진의 하나로 기록됐을 정도로 피해규모가 엄청났다.

페루에서의 처참한 소식은 때마침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 개막을 바로 앞두고 있는 페루축구대표팀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전해졌다. 조국이 대지진으로 아수라장이 됐다는 소식을 들은 페루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자신들의 부모 형제조차 안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대망의 일전을 치러야 했다. 실로 눈물겨운 일이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페루대표팀은 강철 같은 정신력과 남미 특유의 화려한 기술을 앞세워 예선전에서 무서운 돌풍을 일으켰다. 지진비보를 접한 다음 날인 6월 2일 첫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 3-2로 극적인 첫 승리를 거뒀다. 선수들도 감격하고 페루국민들도 기뻐했다. 페루는 이어 모로코를 3-0으로 완파하고 마지막 예선전서 서독(현 독일)에 1-3으로 패해 2승1패를 기록, 조 2위로 8강전에 진출했다. 당시 펠레가 이끄는 최강 브라질을 8강전서 만난 페루는 아깝게 2-4로 졌지만 비탄에 잠긴 조국과 세계인들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흰색 바탕에 빨간색 줄이 비스듬히 그어진 페루대표팀의 유니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월드컵이라는 스포츠무대를 통해 페루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인들은 지진의 무서움 속에서도 가슴속으로부터 뜨거운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멕시코 월드컵에서 눈물의 투혼을 발휘한 페루대표팀은 처음으로 페어플레이상을 받았으며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토비아스 쿠비야스는 신인상을 수상했다. 펠레는 이 대회가 끝난 후 직접 자신의 후계자로 쿠비야스를 지목해 ‘페루의 펠레’로 떠오르기도 했다.

41년 전 페루 지진 참사와 멕시코 월드컵을 되돌아보면서 지난 11일 일본을 공포로 몰아넣은 강진과 쓰나미 여파에 따른 일본 스포츠 스타들의 태도에 자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페루대표팀에서 보듯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일본 선수들도 지진소식을 듣고 충격과 개인적 고통을 느꼈으나 점차 잘 삭이고 있는 분위기이다. 오히려 어려울 때 잘 뭉쳐야 한다며 스포츠를 활용해 국민적, 사회적 통합을 이루겠다는 각오가 더 드러나 보인다.

AP통신은 지난 13일 미국에서 뛰는 일본 스포츠 스타들이 이번 지진을 보고 느낀 반응을 자세하게 전하며 ‘걱정 속에서 평온’을 유지하며 자신의 경기력관리에 주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애틀의 타격 기계 이치로 스즈키는 일본 내 휴대 전화망이 끊기면서 가족과 통화를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고 볼티모어 투수 우에하라 고지도 친구들과 연락을 못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 개막될 미국프로야구에서 크게 동요 없이 자신의 컨디션을 관리하고 좋은 경기력을 발휘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이탈리아 세리에A 인터 밀란에서 뛰고 있는 나카토모 유고는 검은 리본을 차고 경기에 출전하고 있으며 독일 분데스리가 샬케04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치다 아쓰토는 자신의 상의 유니폼에 일본어와 독일어로 ‘일본의 여러분께,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도록 함께 살아갑시다’라고 썼다.

우치다가 소속한 샬케04는 지난 13일 프랑크푸르트와의 홈경기에서 우치다의 열렬한 고국의 성원에 힘입은 듯 승리를 거두었다.

스포츠는 국민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사회적 응집력을 가진 강력한 수단이다. 한국이 지난 1990년 후반 IMF위기의 경제적 고통 속에서 박찬호와 박세리가 미국 프로야구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시름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듯 일본의 스포츠 스타들도 자연적 재앙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는 일본 국민들에게 스포츠를 통한 국민적 통합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스포츠에서 페루가 울지 않았듯 일본도 더 이상 울지 않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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