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전 춘향전에서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남원부에 출두해 제일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부(府)의 고(庫, 창고)를 봉(封)하고 비축 대동미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혹 부사가 부정으로 빼 돌린 재물은 없는가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탐관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는 남원부사 변학도를 아예 고을에서 축경(逐境)하는 것도 재미있다.

-(전략)… 이때 어사또 거동 보소 동원에 좌기한 후 이방 불러 관안(官案)드려 점고한 후 읍폐 묻고, 도서원(都書員) 불러 전결(田結) 묻고 대동색(大同色) 불러 세미 남봉한다 하고… 어사또 본관은 봉고 파직하여 지경을 넘기고 본관 아낙에게 전갈하되 ‘남원 지경서는 잠시라도 머물지 말라’ 하고… (하략)…-

조선시대 지방관서의 고(庫)는 국가재정 기반으로 매우 중요시 했다. 항, 포구 조창(漕倉)에는 세미(歲米)를 모아두었다가 서울로 운반하기 위한 관영 창고인 ‘고’가 있었다. 강변 마을에 창(倉)이름이 붙은 곳은 대개 옛날 고가 있던 곳이다.

고에는 항상 곡식을 저장해야했다. 국가 긴급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고를 열려면 임금의 재가가 나야만 했다. 지방 관리가 상부의 재가를 무시하고 고를 열면 엄한 처벌을 받았다.

고는 관할 수령 책임 하에 물품을 출납할 수 있었으나 관찰사의 철저한 감독을 받았다. 이런 통제에도 불구, 재고가 맞지 않거나 부정이 발각되면 죄를 물었다. 평생 관직에 다시 나갈 길이 막히거나 파직 당했던 것이다. 변학도의 경우는 고를 마음대로 열어 자신의 것처럼 호화 생일잔치를 벌인 죄목이 적용된 것이다.

천재지변이나 전란이 발생하면 목민관은 고를 열어 기민을 구제했다. 진(晉)나라 동군 태수(東郡太守) 곽묵(郭默)의 고사가 재미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고를 열어 상부허가를 받지 않은 채 곡식을 나눠준 것이다. 국법을 어겼으므로 스스로 글을 올려 대죄(待罪)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조서를 내려 포상하고 치하했다.

조선 임진전쟁 중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임금의 재개가 떨어지기도 전에 수령들이 고를 열고 기민을 구제했다는 기록이 많다.

대간에서는 치죄해야 한다고 했으나 임금은 곽묵의 고사에 견주어 죄를 묻지 않았다.

관이 고를 열어 구휼할 때는 죽을 쑤어 백성을 구제했다. 이때 체면을 따지던 양반들도 배가 고파 죽 그릇을 들고 줄을 섰다는 기록이 있다. 자식까지 내다 팔아야 할 정도의 참담한 실정이었으니 체면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코로나19 긴급 재원을 만들려고 자치단체들의 재정 상태에 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당장 경기침체로 인한 세수가 크게 부족하다. 경기도는 피해 여부와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재난소득을 전 도민에게 지급하겠다고 해 선심성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고 있다.

긴급히 지원을 받아야 할 빈곤한 가정과 어려움에 처한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관의 창고를 열어야 한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재난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놀고먹어도 정부가 돈을 주면 산유국에서 가난뱅이 국가로 전락한 베네수엘라와 무엇이 다른가.

선거를 앞두고 표를 얻기 위해 중산층에게까지 일률적으로 돈을 지급하는 행위는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이다.

지금 한국의 경제사정이 그렇게 넉넉한 것이 아니다. 관고를 열어 지역 수령, 호족들과 ‘금준미주(金樽美酒)’로 기생파티를 연 정신 나간 변학도의 봉고파직이 생각나 고사를 더듬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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