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평론] 선거정치와 막말의 추억
[정치평론] 선거정치와 막말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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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병 정치평론가

정치의 절반은 ‘말’이다. 정치인은 말로서 자신의 비전을 드러내고, 말로서 대중과 소통한다. 그것이 ‘행동’으로 귀결되느냐 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청산유수처럼 거침없이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말에 개념이 있고 가치가 있으며 품격이 있을 때 비로소 대중은 ‘신뢰성’을 느끼게 된다. 말을 잘 해서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라 하겠다. 물론 그 저변에는 권력관계가 작동될 수밖에 없으며 또 그것이 정치인의 언어가 갖는 특징이다.

인간이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고 심도 있는 분석을 할 수 있는 것은 언어, 즉 말의 힘이 원천이다. 따라서 말은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서 한 사람 또는 한 집단의 사고와 인식 수준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천박한 사고는 천박한 말의 뿌리요, 천박한 말은 천박한 사고의 열매인 셈이다. 그러므로 말은 사고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한다. 말이 철학의 핵심 주제로 설정된 배경이다. 20세기 언어철학의 최고봉인 비트겐슈타인(L.Wittgenstein)이 말한 “내가 쓰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아는 세상의 한계”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명쾌한 금언이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말잔치가 쏟아지고 있다. 정치판 자체는 개똥밭을 뒹굴고 있지만 그럼에도 유권자들은 그들의 ‘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을 듣고 투표장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지겹고 짜증이 나더라도 민주시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 그리고 미(美)와 추(醜)는 반드시 분별해 내야 한다. 민주정치에도 공짜가 없기 때문이다.

선거 때 정치인들의 아주 저급한 말(막말) 한 마디가 선거 판세를 좌우한 사례가 적지 않다. 막말은 단순한 설화(舌禍)나 실언(失言)과는 구별돼야 한다. 막말은 특정 집단, 특정 세력을 의도적이고도 노골적으로 저격한다. 따라서 악의적이다.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는 이유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선거 때의 막말은 곧바로 거대한 저항에 휘말려 ‘표’를 구했으나 결국 ‘돌’을 맞는 결과로 이어지기 일쑤다. “막말 한 방으로 선거가 통째로 훅 갈수도 있다”는 말은 괜한 농담이 아니다. 특히 선거 막판에는 판세의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침묵하고 있던 부동층의 표심을 자극해서 행동에 나서게 하기 때문이다.

통합당이 비상에 걸렸다. 황교안 대표의 ‘n번방 호기심’ 얘기나 정승연 후보의 ‘인천 촌구석’ 얘기는 설화나 실언에 가깝다. 악의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호 후보의 ‘30~40대 폄하’ 얘기는 막말에 가깝다. 팩트가 아닐뿐더러 의도적이고 노골적으로 특정 그룹을 저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통합당 주요 지지층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적 감정까지 내포돼 있다. 이런 점에서 악의적이다. 반면에 연이어 터진 김 후보의 ‘노인층 장애인’ 발언은 설화로 볼 수 있다. 노인과 장애인을 악의적으로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듣는 노인이나 장애인은 불쾌하다. 30~40대 폄하 논란에 이어 떠진 설상가상의 무게 때문에 후보가 제명된 보기 드문 사례를 남겼다.

김대호 후보 제명 소식이 전해질 즈음 이번에는 차명진 후보의 ‘세월호 유족 텐트’ 얘기가 전해졌다. 공식 후보자 TV토론회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속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차 후보는 이미 세월호 유족들에 대한 폄하 발언으로 지난해 통합당 징계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더 악의적으로 반복됐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노골적이다. 막말에도 급이 있다면 최악이다.

그 직후 통합당 지도부가 발 빠르게 징계 절차를 밟았으며 사실상 후보직 사퇴라는 중징계를 내렸다는 점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그러나 제명 등의 후보직 사퇴로 이쯤에서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자칫 일부 후보들의 ‘막말 한방’으로 선거판 전체가 훅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30~40대의 눈빛은 살아 있다. 촛불을 들고 박근혜 탄핵에 앞장섰던 합리적 중도세력의 굳게 다문 입술도 두려울 것이다. 이들이 돌멩이를 들고 투표장에 간다면 통합당은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중도층 견인은커녕 중도층과 싸우는 형국은 결국 통합당의 무덤이 될 뿐이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지금의 사태를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막말의 두 당사자는 공천 이전부터, 그리고 공천 과정에서도 논란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좀 더 치밀하고도 전략적으로 공천을 했어야 했다. 그들에 대한 다양한 지적이 있었지만 당 지도부와 공천위는 이런저런 이유로 공천을 강행했으며 결국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막말 사태는 사실상 통합당 지도부의 책임이 더 크다. 황교안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치권 안팎의 주장은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의 ‘충청도 핫바지’ 얘기는 끝내 ‘자민련’이라는 충청권 정당을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 터진 정동영 당의장의 ‘노인 비하 막말’로 당시 집권당은 총선에서 곤욕을 치렀다. 지난 지방선거 때는 당시 자유한국당 정태옥 대변인이 ‘이부망천(서울에서 살다가 이혼하면 부천가서 살고 망하면 인천가서 산다)’이라는 말로 선거정치사에 길이 기억될 ‘사자성어’를 남겼다. 이번에 통합당은 결정적인 ‘두 방’이다. 당 지도부가 서둘러 불을 끄긴 했지만 이대로 조용해질지, 아니면 21대 총선 판세를 통째로 흔든 막말의 흑역사에 영원히 기록될지 선거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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