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남역사연구원장

‘프라하의 봄’은 3가지 스펙트럼이다. 첫째는 1968년에 일어난 자유·민주화 운동, 둘째는 영화 ‘프라하의 봄’, 셋째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이다.

1968년 8월 21일 소련의 탱크를 앞세운 바르샤바조약 군대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을 점령했다. 이에 항의해 1969년 1월 19일 대학생 얀 팔라흐가, 2월 25일에 얀 자이츠가 분신자살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노보트니가 1953년부터 14년간 공산 독재를 했다. 그런데 1968년 1월에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두브체크는 ‘인간의 모습을 띤 사회주의’ 노선을 추진했다. 4월에 그는 사전검열제도의 폐지, 언론 및 출판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개혁안을 발표했다. 체코 대중은 열광했다. 이후 ‘프라하의 봄’이라 일컫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러자 소련의 개혁저지 압력이 거세졌다. 하지만 6월 26일에 ‘2천 어 선언’이 발표됐다. 이 선언은 소련이 간섭할 경우 저항하겠다는 선언이었다. 7월 중순에 소련, 불가리아 등 5개국은 바르샤바에서 모여 체코의 개혁 추진에 경고했다. 하지만 사태는 더 악화됐다. 8월 20일 밤에 바르샤바조약 군대 20만명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 진입했다. 8월 21일에 소련 탱크는 바츨라프 광장을 점령했고, 두브체크는 소련으로 납치됐다. 이후 일주일 동안 프라하에서만 수십명이 살해됐다. 10월 중순에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반(半)영구적 주둔이 확정됐다. 이러자 외국군 철수요구 시위, 학생데모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하지만 1969년 4월 17일에 소련의 신임을 받은 후사크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행했다. 후사크는 1971년까지 대규모 숙청을 했는데 50여만명이 공산당원 자격을 박탈당했고, 많은 지식인들은 체코를 떠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영화 ‘프라하의 봄’ 원작)>의 저자 밀란 쿤데라도 프랑스로 망명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11월 17일에 프라하 학생들이 시위했다. 20일에는 시위대가 50만명으로 늘어났고, 27일에는 노동자들도 총파업했다. 프라하의 거리는 연일 시위였다.

12월 초에 공산당은 일당제(一黨制) 폐지를 발표했고, 12월 29일에 하벨이 대통령이 되면서 벨벳혁명이 완성됐다.

벨벳혁명 기념 30주년 하루 전인 2019년 11월 16일, 25만명의 프라하 시민들이 바비스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총리는 ‘소유 기업이 유럽연합으로부터 200만 유로의 보조금을 불법으로 받았다’는 의혹으로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경찰은 지난 4월 총리에게 사기 혐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바비스 총리는 법무장관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측근을 임명했다.

한편, 바비스 총리 퇴진 시위에도 불구하고, 총리가 이끄는 정당은 체코 정당 중에 가장 높은 30%의 지지율이다. (연합뉴스 19.12.18.)

우리는 어떤가? 조국 전 장관 아들의 인턴 활동 확인서 허위발급 혐의로 기소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최강욱(열린민주당 비례대표 후보)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공수처 1호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MBN 뉴스 3.30).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의 우희종 공동대표도 5일 언론 인터뷰에서 “공수처 1호 수사 대상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연합뉴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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